러시아사에 대해 미숙한 지식이나마 수업을 통해 ‘푸가초프의 난’에 대해서 알고 있는 나로서는 역사적인 필터를 거치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푸슈킨의 작품 세계는 일반적으로 ‘모든 것을 포용하는 보편성’으로 설명된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사실주의적
러시아의 역사를 좌지우지했으나 현재 그들의 생일이나 기일은 기껏해야 극소수 관심 있는 사람들의 소일거리일 따름이다. 러시아에서 전 국민의 관심을 끌려면 문화 예술인이 되는 게 지름길이다.
1999년 전 러시아는 태어난 지 이백년이 된 푸시킨의 생일을 대대적으로 축하했다. 푸시킨의 삶과 문
러시아 농민 공동체에서 보았다. 그리고 서구에는 이러한 수단이 없는 반면에 러시아는 이러한 수단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에서 그는 이점을 발견한다.
맑스는 체르니셰프스키의 말을 인용하면서 러시아는 후에 자본주의로 이행하기 위해 먼저 농민 꼬뮌을 파괴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역사적
러시아 안에서는 카자크 족 장교 출신 푸가초프가 엄청난 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한참 흑해 진출에 열을 올리던 러시아는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남하 정책을 잠시 접어야 했다. 그 뒤 나폴레옹이 러시아 정복에 실패하고 몰락하자, 한층 목소리가 커진 러시아의 알렉산드로 1 세는 유럽의 열강들과
Ⅱ. 로마노프 왕조의 전개
1. 로마노프 왕조의 1기
로마노프 왕조의 첫 번째 차르인 미하일 1세(1612-1645)는 16세에 차르가 되었다. 미하일은 ‘젬스키 사보르’라는 전국회의를 거의 매년 열고 ‘보야레 두마’라는 귀족회의 등을 통해 혼란시대 이후 어지러운 러시아 사회를 수습하려고 했다.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