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를 생략한다.
2. 이론투쟁의 준비기(~83년 말)
학생운동의 논쟁은 70년대 중반 이후 시작된다. 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 ‘무림-학림 논쟁’과 ‘야비-전망 논쟁’을 통해 학생운동의 진로에 대한 논쟁을 벌여오던 학생운동진영은 이른바 MT-MC 논쟁을 계기로 변혁지향성을 강화해갔다.
학생운동 내부와 재야 민중운동 내부에도 각기 상이했고, 이는 한국사회의 과학적 분석과 이에 기초한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ꡒ사회구성체 논쟁ꡓ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적어도 1987년 6월 항쟁 이전에 민주주의는 상당히 급진화된 형태 - 제헌의회의 소집, 반제국주의 투쟁 등 - 였고, 이는 운동
의회 주의자들 및 학생들이 1814년 헌장으로의 복귀를 요구했다. 여기에 당시 식료품 가격 상승과 실업 확산 등 경제적 위기에 불만을 품은 도시 노동자들과 군대의 이탈 병력이 가세하여 혁명을 성공시켰다. 혁명이 성공한 후 혁명세력 내에서 공화제와 입헌군주제를 두고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입헌
운동’이라는 주제를 염두에 두고서 ‘현재’를 ‘생활’하고 있는 한, 80년대에 대한 이해는 결코 사치가 아닐 것이다. 세계사적인 격변이 ‘Global Leviathan`으로 그 본색을 나타내보이고 있으며 소위 ’신사회운동‘이 유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민주주의‘와 ’민족 자주‘라는 근대적인
운동은 억압되었다. 메테르니히는 독일의 자유와 통일을 요구하는 학생운동을 탄압하였다. 이때 독일 청년들을 지도할 인물로서 헤겔에 대한 기대가 컸었다. 기본권 문제에 있어서 헤겔은 프랑스 혁명의 추상적인 인권보다도 오히려 독일 초기 입헌주의의 기본권을 지향하였다. 그래서 헤겔의 사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