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화영이 오산학교 교장이며, 3·1 운동 주도자인 남강을 만난 것은 이로부터 일주일 후인 2월 20일 경성부 수창동(현 창신동) 229번지 당시 중앙청년회 간사 박희도의 사랑방이었다. 박희도와 오화영 목사를 비롯하여 이곳에 모였던 정춘수 목사, 오기선, 신흥식 목사는 의기투합하여 다같이 독립운동에
양한묵의 일생을 크게 여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 중 1900년대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양한묵은 결혼과 함께 해남을 떠나 능주군 남평면 (현 산포면)으로 이사하였는데, 이후 약 10여 년간 사상적 방황기를 겪었다. 그러던 때에 그는 동학교주인 손병희를 만나 동학사상을 접함으로써 사상
1. 연구배경
본 조에서는 연구 과제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반미감정, 독도문제, 동북아 균형자론 등 다양한 주제들이 논의되었다. 조원들의 관심문제가 매우 다양하여 모든 조원들의 관심을 충족할 수 있는 한 가지 주제로 논의를 예각화 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현재 한국 사회에서 빈번하게 접하
박준승은 1866년 11월 14일 임실군 청웅면에서 박호진(朴昊鎭)의 3남으로 태어났다. 10세를 전후하여 동학에 깊이 관여했으며, 청웅면에 삼화학교를 세운 김영원을 스승으로 모시고 글공부를 시작하였다. 박준승은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 최시형의 사인여천(事人如天), 손병희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조사사업(1910∼18)으로 조상 전래의 토지를 빼앗기고 빈농·소작농으로 전락, 극히 일부 지주층을 제외하고는 절박한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또한 농지를 빼앗기고 도시로 흘러들어 자유 노동자가 된 사람들은 일본인 노동자에 비해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과 장시간 노동, 비인간적 대우, 민족차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