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한묵은 결혼과 함께 해남을 떠나 능주군 남평면 (현 산포면)으로 이사하였는데, 이후 약 10여 년간 사상적 방황기를 겪었다. 그러던 때에 그는 동학교주인 손병희를 만나 동학사상을 접함으로써 사상적 안식처를 찾았다.
둘째, 그는 당시의 정세를 바로잡기 위하여 애국계몽활동 가운데 정치사회단
한국 사회의 문호를 대외적으로 개방해서 외부 세계와의 교류와 협력을 증진시켜 나가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의 것을 대외적으로 진출·확산시켜 세계문명의 진보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세계화와 민족주의는 일견 모순된 개념으로 인식되고 있고 실제의 역사적 경험이 이를 증
한국을 둘러싼 열강의 세력은 크게 변동하게 되었다. 이렇게 어지러운 시기에 당시 민족의 최대 과제였던 자주독립을 지켜내기 위해 독립협회는 창립되었다.
독립협회의 창립은 한국근현대사에 있어 많은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독립협회가 주로 상류층에 속하는 신 지식층을 중심으로 활동했음에도
활동, 오산학교 설립, 기독교 입교, 민족 산업자본 형성을 통해 초기에는 애국계몽운동이 독립을 쟁취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1919년 3.1운동을 겪은 후에는 당시의 사회 상황과 현실 여건을 인정하면서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펼쳐 이상향을 건설하고자 하였으므로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