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은 다 같이 농업에 종사하여 생계를 유지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봉건제하의 신분적 예속 상태하에 있고 사적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고 자기노동력을 농업생산과정에 팔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농업노동자와도 다른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농민이란 개념은 봉건제 해체 이후 발생한 역사적
산미증식계획은 처음에는 전체 계획기간을 30년으로 하여 논 40만 정보는 관개를 개선하고 밭 20만 정보를 논으로 바꾸며, 논 20만 정보를 새로 개간하는 등 총 80만 정보의 토지 개량을 계획했다. 1차로 15년 동안에 총공사비 1억 6800 엔을 들여 약 42만 7천 정보를 개량하고 연간 약 920만 섬의 쌀을 증산하여
이어지게 된다.(김광신, 「한국 독점자본의 농업지배에 있어서 농협의 역할에 관한 연구」, 고려대 사회학과 석사논문, 1989,
같은 책에서 재인용
이런 과정 속에서 조선의 농촌단체는 농민자치단체로서의 성격이 완전히 사라졌다. 일반적으로 농업협동단체는 농산물의 유통과정에서 중간착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다. 먼저 조선의 통감부건물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식민지 기반을 정비하게 위해 본격적인 통치 준비로 1910년~1918년까지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이로써 조선내의 독립운동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른바 농민운동, 노동운동, 민족독립운동 등의 분화과
운동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지만 당장은 봉건사회의 지주-소작관계를 청산하지 못했고 오히려 일본과 청나라를 불러들여 청일전쟁을 유발하게 되었다. 청일전쟁이후 명성황후 시해사건, 을사5조약에 의해 통감부가 설치되고, 결국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었다. 일제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