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운동, 노동운동, 민족독립운동 등의 분화과정을 밟게 된다. 초기의 농민운동은 생존권이 걸린 운동이었고 조직화 되지 못한 상태였다. 이후에 토지조사사업과 3.1운동을 계기로 뚜렷한 계급의식을 가진 농민이 자기집단의 권익 실현을 위해 집단적 투쟁을 하는 것이 본격적으로 대두된다. 우리는
투쟁소작료 인하투쟁, 지세공과 전가반대투쟁이 중심(1922년까지) 이후 소작권 이동 반대투쟁
4. 전남 무안군 암태도 소작쟁의
1923년 가을 암태도 소작회 결성, 소작료 4할 요구 쟁의전개. 1924년3얼-7월 지주와 경찰을 상대로 한 농민투쟁이 전개, 동아일보의 지원과 전국 노동, 농민, 청년단체의
일본공산당이 1923년 대검거로 인해 궤멸된 이후 1925년 대두된 공산당재건론 속에서 대립된 이른바 '방향전환론'이다. 야마가와는 모든 정치운동이 합법적이며 대중적인 무산정당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야 하는데 1925년 현 단계에서 필요한 무산계급의 대중적 정당이란 부루주아 지배에 대한 모든 반대
조합운동의 임누에 관한 결의」(1930)를 통해 조선에서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강화할 것과 민족개량주의 측 신간회와 투쟁할 것을 지시. 이에 영향 받아 지회에서 신간회 해소운동이 시작되어 마침내 1931년 5월 15일 전국대회에서 정식 해소됨
Ⅱ. 1920년대의 태을교
증산계 교단은 증산 강일순의
수리시설 정비를 통한 토지개량사업에 조선농민이 동원되었지만 개간 후 아무런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다. 수리조합비 역시 과장하게 부과되어 자작농이 토지를 팔고 소작농민으로 전락하였을 뿐 아니라 중소지주조차 몰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직 일본인 지주 등 상당 재산을 갖춘 대지주만이 이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