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을 위해 국가 재정을 우선적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과 민생 안정이 우선이라는 주장이 대립한 것이다. 이는 대동법․양전․호패법 등을 언제 실시하며, 어떤 방식으로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시대적 상황 서술 축소, 대동․균역과 연관 내지 암시하는 파트로 서술...-
억압이 무력해지자 봉건적 지배층은 경제적 수탈에 의하여 양인층과 노비층을 구속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신분제의 동요는 양인층과 노비층의 사회의식에 일정한 변화를 초래했다. 즉, 그들은 이전까지 자명했던 봉건적 신분의 권위나, 그 권위에 바탕한 사회적 억압에 대하여 회의를 품게 되었다.
. 그 후 신진세력은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내세워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세우고 양전 결과를 토대로 계속 전제개혁을 진행하게 된다. 그리고 공양왕 2년, 공·사 전적(田籍)을 불태우고 공양왕 3년 5월에 마침내 과전법을 공포하였다.
시행 이후부터는 중인층의 직역자까지도 사실상 군역에서 면제되는 존재로 합법화되었다. 상민들의 피역하는 방법은 다양했다. 먼저 각급 관청에 투속하여 유학․업유 등을 모칭함으로써 신분상승과 함께 피역을 도모하려 하였다. 18세기 초 민과 지방관청의 결탁으로 설치된 계방 조선 후기 군역
결과 지세의 금납화 확대. 도조법은 화폐지대제 발달의 실제적 배경
2) 상품 화폐 경제 발전
① 공인의 발생
대동법 실시로 인해 관청의 수요품을 조달하는 상인인 공인이 생겨났다. 이전의 불편한 공납제도를 벗어나서 공인들이 물품을 대량으로 주문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상품 경제가 발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