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심성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한창이던 16세기 말엽부터 예학(禮學) 역시 매우 고조되었다. 유학에서 분류하는 예의 종류는 300~3000종이 있다고 할 만큼 잘 세분화되어 있다. 성리학자들은 예학을 연구하여 각각의 상황에 합당한 인간의 행위 규범을 제정, 준수하고자 하였다.
예의 준수는 성리학의
1. 태극 논쟁의 발단
태극 논쟁이란 주자학의 핵심 개념인 태극에 대한 이해 문제를 놓고 회재(晦齋) 이언적(李彦適, 1491~1553)과 망기당(忘機堂) 조한보(曹漢輔)가 벌인 논쟁을 가리킨다. 이언적은 사화의 격동기에 조선 주자학의 기초를 다져 간 인물이다. 경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부
Ⅰ. 주자학(성리학)의 흐름
중국의 성리학에 한국에 도입된 것은 주자 사후 100여년이 지나서 원나라로부터 이루어 졌다. 安珦이 도입한 성리학은 백이정, 우탁, 이제현, 이인복 등에 의하여 연구되었으나, 충분히 소화되어 토착화하기 시작한 것은 牧隱 李穡에 이르러서였다. 목은 이색에 의하여 수용
성리학적 성격을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명종 이후 퇴계 이황에 이르러 성리학의 철학체계에 대한 인식이 확립되고 율곡 이이가 나오면서 성리학적 입장에서의 정치철학의 체계를 내세워, 한국의 성리학이 토착화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기준으로 조선 내에서는 심한 당쟁
성리학은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조선조 후기의 여러 방면의 침체를 벗어날 역량에 부족함을 보였던 것이 또한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실학이 일어났고 이것은 성리학의 형식적 명분론과 같은 것보다는 알찬 내실의 학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본 小論은 유학, 특히 한국유학의 몇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