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군은 6·25 전쟁의 와중에서 급속히 성장하여, 50년 10만 규모에서 56년 70만 대군으로 변했다. 이러한 군부의 양적 팽창은 민간집단이 미성숙한 현실에서 자연히 사회적인 역할 팽창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양적 팽창보다도 정치적으로 더 큰 의미를 가진 것은 군부의 급속한 제도적, 기술적, 조직적
정치세력의 노선과 조직기반
1945년 11월 말까지 이승만과 임정세력이 귀국함에 따라 국내의 한민당과 함께 3대 우익세력이 정립되었다. 이들은 반공, 반소, 반탁의 입장에서 완전히 동일했으나 3자는 내부적으로 많은 상호견제와 갈등을 지니고 있었다. 이승만은 자신을 중심으로 단독정부를 수립하
. 김구, 한독당은 임정법통론에 끝까지 매달리면서 비상국민회의(1946.2.1), 국민의회(1947.2.14) 등을 만들어 이를 중심으로 남한 정국을 풀어가려 했다. 한편 이승만, 한민당 세력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1945.10.23), 민족통일총본부(1924.6.29), 한국민족대표자회의(1947.7.10)등을 조직하여 정국에 대응했다.
거슬러 올라간다. 청와대가 경무대로 불리우던 시기까지 올라가서, 박정희 군사쿠데타를 통한 제3공화국, 4공화국에 이어 전두환의 군사쿠데타로 제5공화국이 들어서는 장면까지 포함된다. 그 중에서 주안점을 두고자 하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했던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의 모습이다.
중심주의 혹은 서구중심주의를 이루고 있는 국가라고 할 만하지만 서구중심주의적 세계관에서 이들의 역사는 배재되어 있다.
또한, 엄정한 사회과학적 관찰은 불가능하겠지만, 한국인이 백인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마저 역시 자본주의적 위계질서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잘 보여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