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맞지 않다고 선언하며, ‘한국적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자 주창하였던 유신체제에 비하여, 제5공화국은 그 체제 정통성의 항목에 ‘민주화’라는 목표를 추가하였다. 제12대 대통령 취임사에서부터 일관되게 그리고 되풀이하여 제시된 전두환 정권의 주장에 의하면, 이 새로운 목표는 전
광주는 그 권력쟁취 명분의 상징적 희생양이었다. 서울의 봄 시기에 있었던 민주화운동세력들의 저항은 오히려 신군부측의 질서유지와 국가안보수호의 이름으로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14일 시청 앞 시위에 이어 15일 서울역에서의 대규모 시위를 기다린듯이 취해진 5·17
민주화운동의 시작은 오랜 기간의 박정희 정권의 독재가 막을 내리고 군사 독재는 이제 그만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정부는 광주도 다른 지역처럼 쉽게 진압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더 운동의 분위기는 고조되어 갔다. 가만히 두고 있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가진 전두환 정권은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1979년 '12·12사태'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계엄군을 투입, 이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임기 중인 8월 16일 하야시켰다. 곧 이어 신군부는 8월 27일 대통령 선거를 위한 '통일주체국민회의'투표에서 전두환 장군을 제11대 대통령으
광주봉기가 갖는 역사적 의의는 다양하게 제시되어 왔다. 이는 인간 존엄성과 사회정의의 수호, 군부독재의 종식, 저항운동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무장투쟁의 실천, 공동체를 위한 자기희생의 결사항전, 진정한 민주주의로서의 자치공동체 실현, 80년대 이후 한국사회운동에 대한 광범한 영향 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