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영공을 향해 비행하였고, 이내 소련 영공으로 비입하였다. 오전 3시 12분 레이더에 나타난 비행기를 추적하던 소련 전투기가 육안으로 KAL 007편을 확인했고, 오전 3시 26분 소련 전투기가 미사일을 발사했다. 오전 3시 27분 나리타 관제소와 교신이 두절되었고, 오전 3시 29분에는 일본 항공자위대 레이
당사자 회의가 개최됨, ICAO(국제민간항공기구)에게 재조사에 관한 권한을 위임. ICAO는 이 사건을 승무원이 항공기내의 조종장치사용에 대해 미숙하였다는 점과 항법장치 이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점이 원인이되 었다고 분석하고, 승무원들의 고의성을 부정하였다. 아울러 소련 측의 격추명령에
대한 수정이 가해진다.
또한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양자간이나 다자간에 민간항공기에
대한 상호개방을 약속하는 조약이 체결되기도 한다.
특히 미국의 주도로 국제민간항공회의가 개최되어 체결된
1944년 시카고 국제민간항공협약은 다자간 체제의 기초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참고) 시카
기 격추사건에 대하여 토의, 46개국이 소련을 비난하였다. 사건조사 목적의 안보이사회 결의안이 제출되었으나 소련의 거부권으로 부결되었다. 결국 소련의 국가 책임의 추급은 실패하였다.
1983.9.15, 한국과 캐나다의 요청으로 ICAO(국제민간항공기구)는 특별이사회를 개최, 소련을 규탄하는 결의를 채
소련 공군 소속 전투기는 복귀하였다. 하지만 KAL 007은 이어 사할린반도 상공으로 접어들었으며, 이에 따라 소콜 기지에서 방공군(공군과 다름)소속의 Su-15전투기가 급히 이륙하여 KAL007기를 추격하였다.
당시 Su-15를 타고 출격했던 겐나디 오시포비치는 KAL 007기의 항법등이 켜져 있으며 민간항공기로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