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일부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만주벌판으로 달려가고 또 일부는 새로운 사상(사회주의)을 바탕으로 더욱 치열하게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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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해방운동(독립운동)의 태동
개항 이후 조선인의 중국관내지역 내왕이 늘어
해방 전야의 시기를 통해 광복을 이루기 위한 우리민족의 좌우 독립운동총체를 살펴볼 수 있으며, 해방이후 정국의 모습에 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조선건국동맹의 여운형, 미국에서의 외교활동 중심의 이승만과 유격대 활동의 김일성과 통일전선운동
김구와 김일성, 임시정부와 항일빨찌산그룹 사이의 합작 모색은 1948년의 「2월서신」에서 처음 비롯된 것인가? 이것 역시 해방 이전의 前史가 있었다. 먼저 1942년에 집필한 것으로 추정되는『백범일지』하권에서, 김구는 이미 김일성과 만주지역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情勢로 말하면 東三省
백범일지』의 구성
『백범일지』는 원래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백범김구 선생이 고국에 있던 두 아들(仁과 信)에게 유서 대신 남겨 주려고 쓰기 시작한 글이다. 평생을 조국의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192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이 되자 살아서 환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중국 상해에 당시 1
대한 반발심리에서 비롯된 과격한 학생, 통일 운동, 국민의식의 나태 등의 수많은 사회적 문제들의 직,간접적 원인으로 작용해왔다.
이렇게 친일파의 재생산구조가 지니는 온갖 부작용과 사회적 문제점들은 역사의 흐름에 흐지부지 묻혀버린, 한낱 비극적이었던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