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을 위한 꾸준한 노력이 존재 하였지만 한민족의 주체적인 힘에 따른 자율적인 독립국가 건설이 아니라는 점에서 후에 해방후정부수립과정에서 민족의 독립성을 갖기 보다는 일본에서 미군정으로 지배체제 이전의 성격을 갖게 된다.
38도선의 확정과 분단
제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정부를 구성한 후,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자유선거를 통해 인민의 뜻과 합치되는 책임있는 정부를 수립한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인 1945년 7월 26일 독일의 포츠담에서 열린 미국 ·영국 ·중국 3개국 수뇌회담의 결과로 발표된 공동선언.
일본에 대해서 항복을 권고하고 제2차 세계대전 후의
Ⅰ. 해방후 제 1공화국 성립까지의 정치상황
해방후 남한단독정부수립까지의 기간은 혼동의 기간인 동시에 우리민족에게 분명 기회의 기간이었다. 하지만 정치 지도부의 분열과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으로 인해 남북분단이라는 또 다른 시련을 겪게 된다. 이 번 장에서는 해방후부터 1공화국의
Ⅰ. 해방후 제 1공화국 성립까지의 정치상황
해방후 남한단독정부수립까지의 기간은 혼동의 기간인 동시에 우리민족에게 분명 기회의 기간이었다. 하지만 정치 지도부의 분열과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으로 인해 남북분단이라는 또 다른 시련을 겪게 된다. 이 번 장에서는 해방후부터 1공화국의
과정에서 기득권을 상실한 친일세력들과 소작제도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지주세력들이 월남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이북 지역에서는 좌우가 함께하는 건국운동의 큰 흐름을 인민위원회가 주도한 가운데 소련군과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었다.
(2) 김일성의 등장과 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