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체제를 추구한 반면, 사림파는 향약의 실시를 통한 향촌 자치를 이상으로 삼았다. 새로 등용된 사림파들은 명분과 절의를 중시한 까닭에 훈구 관료들에게는 거북스런 존재였으나, 성종의 조정으로 심한 대립은 일어나지 않았고 점진적으로 왕권의 안정에 기여하였다. 훈구와 사림은 처음부터 추구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여, 조선을 건국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다. 이 후 실권을 잡은 신진사대부 내에서도 온건파와 왕조 자체를 바꾸려는 급진파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이색․정몽주 등이고 후자는 정도전․조준 등이다. 그러나 정국은 급진파의 우세가 급진세력들은 되었고 정몽주를 죽인 후
붕당정치기를 지칭한다. 이 시기는 지방사림세력이 사화를 거치면서 훈구세력을 대체하여 주도하게 되는 시기이며, 따라서 중기의 시작은 사림세력의 형성으로부터 찾아야할 것이다.
조선중기의 정치형태는 초기에는 일본어용사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당쟁론(黨爭論)’의 관점으로 설명되었다.
붕당론'과 주자의 '인군위당설'(引君爲黨說)에 의해서 그러한 붕당관이 바뀌고 그대신에 공도를 추구하는 이념집단으로서 붕당의 존재의의를 인정받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초기에 훈구세력이 한·당대의 붕당론을 이용하여 신진사류의 발흥을 막기 위한 사화(士禍)를 일으킨 반면, 신진사류
사화가 끝나고 선조에 의해 새로운 정치가 모색되던 때에 해당된다.
정치적으로는 비교적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관리들이 무사 안일과 사리 사욕의 타성에 젖어 있 었으며, 사림의 갈등과 알력이 노골화되고 동, 서 붕당으로 당쟁이 싹트기 시작하는 때였다.
경제적으로는 토지제도의 문란과 공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