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ꡓ 이라는 어쩌면 너무도 진부하고 뻔한 주제가 90년대라는 역사적인 현실 안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제목은 ꡒ낭만적사랑과 사회ꡓ 이다. 이 제목은 살스비의 저서 『낭만적사랑과 사회』와 같다. 단순히 제목뿐만이 아니라 각주를 택하고 있는 형식 역시 소
지켜보는 자연적 성장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 흔히 자연교육의 원리는 아동들에게 일체관여하지 않고, 아동 속에 깃든 소질들이 자연스럽게 발로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큰 오해다. 이것은 루소의 함축성이 많은 낭만적 역설을 문자 그대로 곧이들은 데에서 온 그릇된 견해다.
소설론」, 《문학과 의식》, 1997, 봄호.
라고 말한다. 이것을 권택영은 “윤후명의 소설은 산만히 흩어져 있다. 마치 화자가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듯이 두서없이 일어난 일과 일어나고 있는 일을 늘어놓는다.” 권택영, 「고독의 환유」,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나남, 1990.
라고
사회적으로 자기파멸에 이른 한 여성을 그려낸 이 작품은 사실상 강하고 '남성적인' 여성의 재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 속에서 여성이 겪는 좌절과 숙명을 그려낸 것이다. 그녀에 대한 최초의 낭만적 소문은 1796년 초 스티븐턴 이웃 마을 목사의 조카로 잘생긴 아일랜드 청년 톰 러프로이와의 연애담
사랑에 빠졌으나 얼마 안가 애인이 죽었다고 한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 사랑과 결혼을 깊이 다룬 까닭에 이러한 관계의 진상을 확인할 필요가 있으나, 불행하게도 증거가 불충분하다. 언니 캐산드라는 제인의 사생활을 세심하게 보호했으며, 제인이 죽은 뒤 다른 가족과 함께 제인의 편지를 검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