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금 정책은 변화를 맞게 된다. 지금까지는 인조대 친명 배금 정책으로 인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발생하였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졌으나, 이는 당시 명과 후금, 모문룡의 문제, 국내 세력 등의 연장선에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여기서는 광해군의 몰락 원인과 대후금정책의 실패를 중
후금의 건국
後金의 건국자인 누르하치는 건주좌위의 도독 맹가첩목아의 6대손으로 그의 선조들은 건주좌위의 지휘사, 도독 등의 관직을 맡았던 여진족의 지배층 출신이다. 명군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성장하나 명군이 아타이(阿太)공격하는 과정에서 조부와 부가 살해되자 니칸 와일란의 숙수
③ 광해군의 중립외교
명의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 후금은 명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고 명나라는 큰 병력을 풀어서 후금을 공격하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 지원병을 보내줄 것을 요청해 왔다.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1619년 1만 3천 명나라의 원병을 보냈으나, 도원수 강홍립은 후금의 감정
1. 후금의 건국과 누르하치
현대 중국의 동북 지방에는 고래로 퉁그스계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때로 발해나 북송을 멸망시키고 국가를 형성하기도 하였는데 금 등이 이런 국가이다. 이들은 쥬르첸(女眞)족이라 불리었는데 명조 때에는 건주(), 해서(), 야인() 여진의 3부로 나뉘어져 있었
후금 건국
누르하치의 여진 통일은 금조(金朝) 이후에 다시 한번 여진족을 통일한 것이며 이후 만주족 형성을 촉진시킨 계기가 되었다. 또한 오랜 분열을 종식시킴으로써 생산력 발전의 계기를 가져왔다. 여진을 통일하여 8기로 조직한 다음 누르하치는 만문(滿文)을 창제하여 문화적인 통합을 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