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약용의 생애
다산은 1762년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1730-1792)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로 조선시대 유명한 서화가인 공제 윤두서의 손녀였다. 다산의 아명은 귀농, 자는 미용, 송보이고, 호는 사암, 열수, 다
정약용은 여느 일반 사대부처럼 자신의 유배생활상을 전하고 안부를 묻거나 가르침을 전하는 등의 방편으로 서신(書信)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주목할 점은 정약용에게 편지란 ‘세상과 통하는 단 하나의 통로’로써 유배생활에서 오는 아픔을 달래고 위로받기 위한 정서 교감의 장(場), 그 이상의
마른 목은 길쭉하여 따오기 같고
병든 살갗 주름져 닭살 같구나.
팔다리는 아직도 움직일 때련만
걸음을 혼자서 옮기지 못하네.
관가의 돈 궤짝 남이 볼까 숨기기 바쁜데
우리들 굶주리게 한 것이 바로 그것 아닌가.
관가 마구간 살찐 저 말은
다름 아닌 우리들의 피와 살이네
슬피 울며 고을
정약용을 죽이려는 세태 속에서 정약용의 피안의 세계는 오직 학문이었다. 그는 문을 닫아걸고 죄수처럼 머리도 빗지 않고 1815년 문산 이재의에게 보낸 정약용의 편지에서
학문에 쉬지 않고 매진했다. 강진에서의 유배기간은 다산에게는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매우 알찬 결실을 얻은 수
편지인 '서'(書)와 척독의 차별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척독의 美學性을 발견
『명척독』(明尺牘) – 발문
“단사척언(單詞隻言)으로 이치의 핵심을 곧장 깨뜨려, 사람의 뜻을 꺾어 굴복시키면서도 뜻은 말 밖에 있는 것.”
<與權汝章 庚戌五月>
兄在江都時,歲再至洛下,則輒留連於鄙邸,杯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