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개혁
정약용은 당시의 사풍이 시부 만을 숭상하고 시무 에 밝지 못한 것을 비판하였다. 그는 참 선비의 학문은 본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케 하며 오랑캐를 물리치고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며 문에 능하고 무에도 능하여 적당하지 않은 곳이 없는 것이라고 하여, 시무에 능한자를 등용할
조선조초인 15세기까지의 문인들이 한정을 구하고 차로써 마음을 달래는 취미 차로써의 문인다도가 발달하였다. 김운학, 《한국의 차 문화》, 현암사 1981.
이색의 《다부》를 시작으로 서거정 , 김시습 등이 고려말엽의 문인차의 대표적인물이며 후기에 다산 정약용 《동다기》,에서 차의 개념을 설
문화와 청에 들어와 있는 서양의 선진 과학기술을 적극 받아들이자는 담헌 홍대용(1731-1791) · 연암 박지원 · 초정 박제가(1750-?) 등이 중심이 된 북학파가 바로 그것이다. 권력에서 소외된 기호(畿湖) 남인(南人) 중심의 성호학파가 유형원을 계승하면서 토지 및 행정기구 등 사회제도의 개선에 치중한다
인물을 관리로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익은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주체성 있는 역사 의식인이라 주장하고 중국 중심으로 세계관을 탈피하고 독자성을 지닌 민족사의 인식과 시세에 기초한 객관적인 역사서술의 태도로서 조선현실을 직시할 것을 강조하였다. 정약용은 실사구시를 강조하고 아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