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일 것이다.
이황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로서 그 명성은 후대까지 이어 내려오고 있어 아직도 많은 후학들이 그들의 사상을 배우고 따르고 있다. 이황은 생후 7개월 때 외간상(外艱喪)을 당했다. “신하는 임금을 아버지처럼 사랑해야 하고 임금은 하늘을 아버지처럼 모셔야 한다‘며 퇴계
퇴계는 배우는 자와 더불어 강론하다가 의심나는 곳에 이르면 자기의 소견을 고집하지 않고 반드시 널리 여러 사람의 의견을 취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자로서의 훌륭한 면모를 지닌 이황의 교육사상 특징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육목적의 본령을 윤리적으로 확립하고 문예나
Ⅰ. 퇴계이황의 생애
퇴계는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온계리에서 태어났다. 진성이씨 치(値)의 아들로 연산군 7년(1501) 11월 25일의 일이다. 아버지는 이때 40세, 어머니는 32세, 위로 형이 여섯, 누이가 하나인 7남 1녀 중의 막내아들로 탄생한 퇴계는 난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이었다. 그래서 여러 자녀
퇴계, 우리는 이러한 퇴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윤리문화학을 전공하고 있는 나조차, 고등학교 윤리시간에 퇴계에 대해 배운 부분이 거의 전부라 해도 될 만큼, 대학에 들어와서는 동양윤리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부끄럽게도 ‘원효와 퇴계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강의 덕분에 동양사상의
Ⅰ. 서론
퇴계의 철학 사상은 고봉 기대승(1527-1572)의 사단칠정 논쟁에서 잘 드러나 있다. 두 사람의 논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퇴계가 서울에 살던 53세 때 이웃에 사는 추만 정지운이「천명도설」을 지어 보여주었는데, 퇴계는「천명도설」의 내용 중 사단칠정에 관한 부분을 개정한 데서 비롯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