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5~1636)이라는 사람이 『화선신수필(畵禪室隨筆)』에서 문인화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면서 직업화가의 그림과는 다른 수묵으로만 그린 문인들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이 지금 현재까지도 ‘문인화’의 개념으로 남겨져 있는 것이며, 동시에 독특한 회화의 범주로서 유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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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5~1636)을 중심으로 진계유, 막식룡 등의 사대부 화가들은 원대와 명대에 꾸준한 진보를 보인 문인화 이론에 한층 더 당위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들 송강파 화가의 중심인물은 동기창(명대의 가장 전형적인 사대부 화가로서 예부상서를 포함한 많은 관직을 역임했으며 원대의 조맹부, 그리고 1
1555-1636)과 진계유(陳繼儒, 1558-1639)를 지형산으로 초청하였는데 왕형(王衡)은 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였다. 왕시민 역시 이러한 집안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서화를 배워 탄탄한 기초를 닦았다. 만력 42년(1614) 왕시민은 수도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는데 상보승 벼슬을 시작으로 관직이 태상사
(2) 직접원인
1) 개신교 연합과 카톨릭 제후연맹
1606년 작은 제국도시 도나우베르트에서 한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당국의 허락을 받지 않고 성 마가 축제일에 축하행진을 벌이다 개신교들이 투석으로 방해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를 계기로 1608년 카톨릭 대표들은 1555년 이래 빼앗긴 모든 교회 재산을 요
1555년 아욱스부르크 종교협약(cuius regio, eius religio)에 따라 영주가 개신교를 선택할 경우, 자유로운 종교생활이 가능했다. 이것은 카톨릭과 루터파 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어서 사실 칼빈파등 다른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서유럽에서는 칼빈주의가 활발했던 반면에, 독일내에서는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