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sSeiende als Seiendes; being als being) 탐구하고, 존재자의 본질과 그에게 속하는 규정들을 탐구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제일철학'(prote philosophia)으로 부른다. 이는 '신학'이나 '지혜'로 불리어지기도 한다. '제일철학'을 특히 '지혜'라 부르는 것은, 우리가 어떠한 존재자에 대해 단순히 아는 것을
때문에 맨 처음 잘못 끼워진 단추를 제대로 끼우고 나서야만 형이상학이 정립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그렇다면 형이상학이 저지른 최초의 과오는 과연 무엇인가?
그는 그 최초의 과오를 존재(das sein)와 존재자(dasseiende)간의 구분이 제대로 되지 않은데 에서 찾았다. 형이상학은 존재는 존재 자체로
das Wahrhaft-Seiende und Ur-Eine)는 영원히 고뇌하며 모순에 차있는데, 동시에 황홀한 비전 (Vision), 즐거운 가상을 자기의 끊임없는 구원을 위하여 필요로 한다. 그 가상에 완전히 사로잡히고 그 가상으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우리는 그 가상을 진정한 비존재자로서, 즉 시간, 공간 그리고 인과성 안에서 지속적
das Freisein für den Tod), 즉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그 죽음과 지속적인 관련을 맺는 것으로 체험된다. 불안 속에서 모든 존재자는 '무(無)와 무처(無處)'로 빠져들고, 인간은 자신의 실존 속에서 방황하면서 어디에서도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인간은 무와 대면한다. 이제 평범하고 명백한 일상성은
증기기관차에서 KTX까지
1. KTX와 속도의 혁명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 문화를 읽다』, 동녘, 2009, p.179~181
KTX의 출현으로 생활이 참 편리해졌다고들 말한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이동하는 데 두 시간 정도면 족하다고 한다. 전국이 한나절권에서 반나절권이 된 셈인데 조선시대나 수십 년 전 증기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