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共産黨)을 창단하기에 이른다. 진독수는 중국공산당 창당 초기부터 총서기장을 맡으면서 중국공산당 혁명의 중심에 서게 된다. 따라서 초기의 중국공산당 혁명을 다룸에 있어서 진독수라는 인물을 빼 놓고 설명할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한지 얼마 되지 않은 진독수와 중국공산당원들은 원
中國共産黨이 창당될 때 가입하여 창립당원의 일원이 되었다. 1922년부터 그는 《小說月報》 編輯者라는 위치를 활용하여 공산당의 中央連絡員으로 일했으며 공산당이 개설했던 학교에 강사로 나가 공산당 간부양성에 일조하기도 했다. 1925년 이후에는 직접 군중운동에 뛰어들었고 《公理日報》를 창
中國左翼作家聯盟이 결성되었다. 뒤이어 여러 산하기구들이 활동을 하던 이 때는 滿洲事變과 上海事變이 일어남에 따라 中國人들 사이에서는 抗日이라는 애국적 정서가 분출하고 민족주의의 물결이 고조되었다. 1932년 中國共産黨은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파악하고 조익과 같은 左翼文人團體와 지
제1차 국공합작을 가능하게 한 직접적 요인은 두 가지로 파악할 수 있다. 하나는 孫文을 포함한 국민당 내부의 문제인 陳炯明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코민테른과 국민당의 합작추진이다. 소련의 교두보인 코민테른은 陳炯明사건 이후 열강의 지원을 얻고자 했던 국민당 지도부와 접촉하는 동시에,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