姜弘立이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 끝에 부득이하게 내린 결단이었고, 이는 왕의 뜻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왕은 명의 국력이 후금을 상대할 수 없음을 꿰뚫어 보았고 동시에 조선의 출병이 결정적으로 불리하기 때문에 원병의 파견보다는 「角聲援(양면작전)」을 고집하였다. 그리고 조선군의 총사령관
姜弘立)은 제주목사를 독려하여 왜군과 싸우게 하고,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출전하여 왜군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서울로 떠났다.
한편 조정에서는 선전관(宣傳官) 최충남(崔忠男)을 출전시켰으나 대패하고, 최충남은 전사하고 말았다. 이 사이에 왜군은 서울로 쳐들어 왔다. 선조는 할 수 없이 피난을
Ⅰ. 서론
사림파는 15세기의 사학파에 연원을 두고 형성되었다. 조선의 건국에 반대하여 은거한 길재에서 비롯되는 사학파의 전통은 김숙자를 거쳐 김종직으로 계승되었다. 사학파의 학풍은 소학과 가례를 중심으로 성리학 이념의 실천에 치중하는 것이었다. 또한 향촌의 중소지주층인 사학파들은 15
서론 : 화약무기와 군사혁명의 ‘신화’
일반적으로 유럽 내부에서의 화약무기 도입이 가져온 여러 가지 변화상 중 가장 의미있는 현상으로 간주되는 것은 기사군 중심의 중세적 군대가 다수의 보병 중심으로 편제된 근세적 군대로 재편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과서적인 기술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