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격동의 19세기, 박은식(朴殷植)과 신채호(申采浩)의 성장과 시대배경
백암(白巖) 박은식(1859~1925)과 단재(丹齋) 신채호(1880~1936)는 민족주의 사관의 선구자로 일컬어진다. 이들은 1900년대 초에 황성신문(皇城新聞),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 등의 언론기관에서 종사하며 일제의 침략 아래 식민
1910~1920년대의 조선에서는 일제의 식민통치로 인해 우리 민족의 말은 물론 우리 민족의 역사를 배우고 가르치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게다가 대한제국 시기의 사서 또한 이미 식민사학에 오염되어 있었기에 이 시기에는 개인의 역사의식과 역사를 알고자 하는 지적 호기심마저도 일제의 식민사학(植
신채호사학은 박은식 사학과 함께 한국사학을 근대적인 학문으로 성립시키는 데 큰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신채호와 박은식의 역사학은 민족주의사관에 입각하였다는 점과 역사학방법론을 수용하여 한국사학을 근대적인 학문으로 성립시키려 노력하였다는 점에서 공통되지만 양자간에는
. 하지만 남언경(南彦經)이요(李瑤)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 등에 의하여 수용(受容)되어 정제두(鄭齊斗)에 의하여 양명학파가 수립되었다. 그로부터 이종휘(李鍾徽)이광사(李匡師)이충익(李忠翊)정동유(鄭東愈)이건창(李建昌)이건방(李建芳)박은식(朴殷植)정인보(鄭寅普) 등으로 계승발전되었다.
朴殷植)·임치정(林蚩正)·이종호(李鍾浩)·주진수(朱鎭洙)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다
[배경]
1905년 을사조약 체격 후 헤이그 특사 파견을 트집 잡아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를 강제 해산하는 등 일제의 한국 침탈행위가 날이 갈수록 그 도를 더해가자 이에 대항하고 국민역량을 한데 모아 국권
朴殷植)의 《한국통사》가 일제에 준 충격은 매우 컸다. 이를 계기로 그들은 반도사편찬위원회(半島史編纂委員會)를 대폭 확대, 개편하여 총독부의 정무총감이 회장이 되는 조선사편찬위원회(朝鮮史編纂委員會),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로 발전하였다. 한편 국내의 민족주의자들의 민립대학설립
(朴殷植)
[1] 유교의 교육
[1] 유교의 교육 : 각 개인의 인격 완성을 통한 이상사회의 건설 지향
교육의 중요성 : 유교는 그 자체가 교화를 목적 → 교육은 유교에서 중요한 문제
교육의 어원 : 교(敎) + 육(育)
교육이란 인간의 내부적 능력을 개발시켜 미숙한 상태를 성숙한 상태로 만든다는 의미를 포함
朴殷植 등에 의하여 심학에 대한 관심이 새로워지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거의 [程朱學 절대 우위의 성리학]의 전개를 본 이것이 한국 성리학의 첫 번째 특징이다.
2. 主知主義 특징
정주학과 육왕학과의 차이는 대체로 전자가 주지주의의 경향이 강한 데 비하여, 후자는 主情
1. 교회와 충군애국의 민족정신
1.1. 충군애국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나라를 사랑함. ≒충애(忠愛)
의 교회
한국교회의 충군 애국적 민족정신은 1896년에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었다. 민비시해(閔妃弑害)나 춘생문(春生門) 사건을 거치면서 기독교의 민족정신이 대담한 조직력으로 구현되고 있었기 때
01 주자
주자 [朱子] (1130~1200)
중국 남송의 유학자.
주자학 집대성
우주론적. 인간론적 형이상학 수립
이기론(理氣論), 성즉리(性卽理),
선지후행 (先知後行) 등을 주장
★ 분서갱유란 ?
진나라의 승상인 이사(李斯)가 주장한 탄압책으로
실용서적을 제외한 모든 사상서적을 불태우고 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