銃筒)과 화승총, 쌍혈총통(雙穴銃筒) 등 많은 화포가 사용되었고 화차 역시 계속 발전하여 임진왜란시기 행주산성전투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19세기에 들어와 나라의 방위력은 비할 바 없이 약화되어 열강의 침투가 시작되자 대원군 시기에 이르러서 화약무기의 발전은 다시금 이루어진다. 이때에
만력기묘명승자총통은 글자 그대로 명(明)나라 만력 7년(1579)에 제작된 승자총통이다. 조선시대 총통을 부를 때, 천자문의 순서를 따라 천(天)ㆍ지(地)ㆍ현(玄)ㆍ황(黃) 등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크기 순으로 이름을 정하는 데, 이 승자총통(勝字銃筒)에서 승(勝)자를 택한 이유는 불문명하다. 이런 승자총
銃筒碗口)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이 때 다른 총통과 마찬가지로 완구에 대한 개량도 일단락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중기에는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에는 대완구ㆍ중완구ㆍ소완구ㆍ소소완구가 소개되어, 그 종류가 다양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후기에는 ≪융원필비(
만력기묘명승자총통은 글자 그대로 명(明)나라 만력 7년(1579)에 제작된 승자총통이다. 조선시대 총통을 부를 때, 천자문의 순서를 따라 천(天)ㆍ지(地)ㆍ현(玄)ㆍ황(黃) 등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크기 순으로 이름을 정하는 데, 이 승자총통(勝字銃筒)에서 승(勝)자를 택한 이유는 불문명하다. 이런 승자총
銃筒)이 지자총통이 전신(前身)이다. 지자총통의 문헌기록은 ≪신기비결(神器秘訣)≫과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에 잘 남아 있어 그 일반적인 성격을 알 수 있다.
발사물인 기본적인 형태는 약통(藥筒)ㆍ격목통(激木筒)ㆍ부리〔嘴〕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약통은 글자 그대로 화약을 채우
銃筒 등의 화약무기들이 보며, 당시 조선의 과학수준과 무기의 발달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활이나 화약무기 등으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가려진 존재가 있으니, 바로 칼, 즉 검이다. 조선시대에는 그 전의 시대에 비해서 칼 칼(刀)과 검(劍)을 날의 차이로 구분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1. 세종대왕의 역사
① 세종대왕의 연혁
- 세종(世宗,)
-1397년 음력 4월 10일~ 1450년 음력 2월 17일,
-조선의 제4대 왕 (재위 1418년~1450년)
-성은 이(李), 휘는 도(裪), 자는 원정(元正)
-시호: 세종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
-비는 소헌왕후(昭憲王
조선조는 개국한 지 9일만에 문무관제를 정하여 반포하였다. 이에 의하면 서반은 동반과 별도로 무산계(武散階)를 설정하여 구분하는 동시에 중앙군제는 10위로 구성 발표하였다.
건국 초기의 10위제도는 의흥친군좌우위를 제외하고는 고려 말 거의 그 기능이 마비되엇던 중앙의 2군 6위를 그대로 준용
활의 종류는 크게 단순궁(單純弓), 강화궁(强化弓), 합성궁(合成弓)의 3종류로 나뉜다.
1) 단순궁은 나무, 대나무 등의 막대기로 만든 간단한 활이며 궁체의 단면이 둥근 경우가 많다. 이런 단순궁은 남미,북미의 동남부,호주,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등지에서 주로 사용되었으며, 유럽에서도 중세에는
세종대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유교정치,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 즉, 집현전을 통하여 많은 인재가 배양되었고,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