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라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결국 의정원.정부의 확대.개조는 독립운동자대표대회와 긴밀히 결합된 것이었으며, 5당통일회의가 논의한 핵심 주제이기도 했다.
민혁당과 신한민주당은 의정원 회의와 5당 통일회의를 통해서 임시헌장수정.원부확대 개조.독립운동자대표대회 소집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Ⅰ. 서론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임정의 외교활동은 종래와 같이 막연하게 한국 독립에 대한 지지와 국제사회의 동정여론을 불러일으키려던 선전외교활동에서 벗어나 교전단체 승인을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데까지 발전하였다. 이것은 태평양전쟁 발발로 아시아와 태평양 상에서 일제에 저항하는 반
-중국 관내의 민족해방운동단체를 결집시키려는 노력이 나타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조직. 1934년부터 완전한 대동단결체를 만들기 위한 작업으로 1935년 7월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 창당. 이 정당에는 의열단과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신한독립당, 대한독립당 등이 해소하여 들어옴.
독립당
중국 관내지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우익진영 인사들이 한국독립당 조직
남경: 한국혁명당, 신한독립당 등
새로이 결성된 독립운동정당 및 단체들이 각각 독자적인 기반과 세력을 형성하고 분산적인 활동을 계속하자, 독립운동전선에서는 이들 각 단체의 전선통일을 이루자는 움직임이 일
독립당의열단조선혁명당신한독립당대한독립당 등 다섯 당을 통합하여 민족혁명당을 결성하였다. 민족혁명당은 김구일파와 임시정부고수파들의 불참으로 중국관내 민족해방운동세력 전체를 망라하지는 못하였다는 한계점을 지닌다. 게다가 가맹세력간의 성향노선상의 차이로 진통을 겪은 후, 한국
독립당을 전망하는 것으로서, 당시의 실정을 감안하면 민족해방운동의 효율적 실천에 중점을 둔 현실적 방안이었다. 그러나 다수 의견이 형식과 명분을 중시하는 정부수립론으로 기울어졌고, 그 결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도 여러 곳에서 정당명칭을 사용하는 조직
신한 청년당(1918) : 김규식을 따라 강화 회의에 대표로 파견
연해주
- 블라디보스크에 신한촌 형성
- 권업회 조직(자치 기구), 대한 광복군 정부 수립(1914)
미주
- 대한인 국민회(1910) : 미주 지역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 단체로 성장
- 대조선 국민 군단 : 박용만이 하와이에서 결성 -> 군사 훈련
신한혁명당의 망명정부 추진
한국독립운동 세력은 일본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계기로 중일, 또는 독일의 대립이라는 상황을 예견하면서 세계대전의 발발을 독립의 발판으로 예견함. 전쟁 초기에 전세를 유리하게 이끈 독일의 승리를 확신하여 이후의 정세가 독립운동에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함. 이
(1919.4) : 상하이에 위치/국무총리 이승만/ 신한청년당 중심
2-2) 임시 정부의 통합(1919. 9.)
· 한성 정부의 정통을 계승하고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대한 국민 의회 통 합하여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 탄생.
· 대통령은 이승만, 국무총리는 이동휘로 하는 삼권 분립의 민주공화정부 수립
독립당 결성방안에 합의를 이루었다. 그 방법은 우선 각지에 유일당촉성회를 조직하고 이를 통일하여 민족유일당을 결성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합의하에 임시정부 중심의 우파세력과 북경지역의 좌파세력을 중심으로 대독립당북경촉성회가 결성되었다(1926. 10). 이를 계기로 중국 관내의 민족유일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