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 의용대와 조선의용군의 창립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의열단의 김원봉이 대장이 되어 창립한 독립군이었다. 창립 직후인 1938년 10월 말 무한이 함락당하자, 조선의용대 제2구대 대원 가운데 약 20명을 인솔하여 1939년 3월 먼저 중국공산당의 서북지구로 들어갔다. 이어서 1939년 12월에는 조
Ⅰ. 서론
임시정부 요인들이 중심이 된 남한 민족주의자들의 통일운동을 당시의 정치현실이란 협애하고 단기적 차원이 아닌, 보다 확대되고 장기적인 민족운동의 안목에서 자리매김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입장에서 초점은 그것이 당시 통일을 실현시켰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남긴 유산은 무엇
Ⅰ. 서론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임정의 외교활동은 종래와 같이 막연하게 한국 독립에 대한 지지와 국제사회의 동정여론을 불러일으키려던 선전외교활동에서 벗어나 교전단체 승인을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데까지 발전하였다. 이것은 태평양전쟁 발발로 아시아와 태평양 상에서 일제에 저항하는 반
의용대(朝鮮義勇隊)의 건립과 화북지대(華北支隊)의 설치
중·일전쟁의 발발은 재중 독립운동가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 것을 의미했다. 중국 역시 일본과의 싸움에서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대항하는 국가들과의 연합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
* 김두봉의 풀어쓰기안
북한 문자개혁의 이론적 기반
* 조선어학회의 가로글씨안
남한 문자 개혁 운동의 이론적 기반
1936년 11월 28일 학회임시총회에서 임시안으로 채택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의 색인에 사용
* 최현배 <글자의 혁명>
한자 폐지와 풀어쓰기 주장
군정청 문교부의 ‘문교 연
Ⅰ. 답사하기에 앞서
1. 답사 경위
인천의 도시발전의 역사는 제국주의의 침탈의 역사와 그 흐름을 같이한다. 운요호 사건(1875), 신미양요(1871) 등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은 조선의 수도 한양의 목줄과도 같은 서해안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일본에 의하여 국권이 피탈되면서 조선의 항구도
해방전후사
(김원봉에 대하여....)
1. 인물소개
김원봉은 의열단장, 조선의용대 창설, 임시정부광복군 부사령관, 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 북한정부 검열상 등 다양한 발자취를 남겼지만, 그는 남북 모두에게서 잊혀지게 되고 말았다. 남한에서는 월북을 한 이유로 그의 일가친척이 풍비박산이 났고
의용대를 건립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 휘하에 소속되었다.
조선의용대를 지도했던 지도위원회는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 인원과 민혁당.해방동맹.혁명자연맹 등 한인 좌파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민혁당 당수 김원봉은 조선의용대 대장을 맡았다. 한편 의용대의 정치적 노선을 앞
의용대결성을 제안하였다. 모든 조선인이 참가한다는 조건으로 임시정부계열과 당을 이탈했던 조선청년전위동맹(1938년 9월 이탈)에 참석을 요청했으나, 임시정부계열은 거부하고 조선청년전위동맹계열은 참가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창설되자마자 무한방위전에 참가하여 대적심리전적후 공작활동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