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었다. 1909년에는 이완용 내각의 내부대신이 되어 1910년 한일병합 조약에 서명한 뒤,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됨. 10만 원의 은사공채를 받았으며, 정4위에 서위되었다. 한일병합 후에도 경학원의 대제학에 임명되어 계속해서 친일 활동을 했다.
●논란
1. 합법론
일본은 한일 합방조약을 합법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이 한국병합 합법론의 중요한 근거로 내세우는것은 '조약문 자체에서 형식적인 문제가 없으며, 국제법상 조약에 준수한 조약이라는것'이다. 즉, 일본제국은 을사늑약이 가졌던 여러 가지 부당함을 의식했던 것인지 한일병
일제의 식민지배라는 민족적 울분을 건드리는 역사를 고찰하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역사라는 것은 그 공과를 따진다 하여도 소급하여 바로잡을 수 없다는 점이 공과를 따지는 행위자체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 같다. 역시 미래사로서 과거사를 공부하기 위함인가?
한일병합에는 어떤 국
한일 간의 외교정세, 그리고 그로 인한 국민들의 여론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일왕 생일파티 기념행사는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크나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다른 국가에 주재하고 있는 대사관이라면 당연히 해당 국가의 국민들의 여론을 신경 쓰고 그에 맞게 업무를 하는 것이 자명한 일이다. 아
양요를 통한 서양과의 만남으로부터 1910년 한일병합에 이르는 반세기 동안, 한반도는 수많은 대내외 차원의 사건들에 직면한다. 대표적으로 강화도조약, 임오군란, 갑신정변, 청일전쟁, 갑오개혁, 러일전쟁, 을사조약, 한일합방 등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한반도 안팎의 정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