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동북공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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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동북공정의 현황과 목적

2. 중국 측 주장에 대한 검토

1) 요하문명론의 등장
2) 고조선에 대한 관점
3) 고구려에 대한 관점
가. 중국의 주장
나. 중국의 주장에 대한 반박
다. 고구려사가 한국사인 근거들
4) 발해에 대한 관점

3. 우리의 대응방식의 문제점과 앞으로의 방향
4. 중국의 시선으로 바라본 동북공정
5. 역사에 대한 인식



Ⅲ. 결 론



참 고 문 헌


본문내용
근거해 황하문명보다 앞선 요하문명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모든 학자들이 요하문명의 존재를 인정하고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이 요하문명을 동북공정 작업을 위한 근거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요하문명이 중국만의 문명이라 주장한다. 따라서 요하문명론에 대한 중국의 이러한 주장이 수용된다면 동북공정의 작업은 더욱 쉬워지게 된다. 왜냐하면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영토범위 중 많은 부분이 요하문명이 발견된 지역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하문명이 중국의 것이라는 사실이 인정되는 순간, 그 부근에서 나라를 형성했던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국민들은 그들의 후예가 된다. 이러한 논리는 이 나라들을 중국의 역사로 보는 데에 있어서 큰 타당성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모든 세계 문명을 포괄적으로 다룬 역사가인 토인비는 ‘문명의 단위’를 ‘국가보다는 크고 세계보다는 작은 중간적인 범위’에서 구했다. 그러므로 요하문명이 인정된다 하여도 중국만의 문명으로 본다는 것은 그들의 주장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그들의 공동문명으로 에게문명을 잡고 있듯이 요하문명을 동북아 문명으로 보고 한․중․일의 공통적 문화로서 다루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2) 고조선에 대한 관점 -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 전부터 기원전 108년까지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에 존재한 한국 최초의 국가로 알려져 있다. 중국은 동북 공정 작업을 위해 고조선도 자신의 역사로 편입하려고 한다. 특히 중국은 고조선의 역사 중, 기자조선의 시기를 동북공정을 위한 근거로 사용한다. 기자조선은 중국 은나라 말기에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단군조선에 이어 건국하였다고 전하는 나라이다. 따라서 고조선은 중국의 은, 상 왕조의 후예들이 한반도에 건립한 자신들의 지방정권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조범종, 우석대 교수는 이렇게 반박한다.
기자조선 관련 사료는 신빙성이 없어 학계에서 역사로 인정하지 않는다. 중화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역사가 아닌 전설까지 끌어들이는 것이다. 여운건, 오재성, 『동북공정과 고대사 왜곡의 대응방안』, 한국우리민족사연구회, 2006, p.83.

그러나 기자조선에 대하여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만으로는 효과적인 대응이 불가능하다. 실재로 많은 학자들이 기자조선을 인정하고 있고, 그 자료도 상당수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도 기자에 대한 언급이 있다.
海東(해동)에 國家(국가)가 있은 지는 오래였다. 箕子(기자)가 周(주) 王室(왕실)에서 책봉을 받음으로부터 漢初(한초) 衛滿(위만)이 稱王(칭왕)할 때까지 年代(연대)는 久遠(구원)하나 文獻(문헌)이 疎略(소략)하여 詳考(상고)할 수는 없고......(이하 생략) 김부식, 『삼국사기』 제29권의 본문 내용 中 (www.krpia.co.kr).

이러한 기록을 보면 기자조선이 존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기자조선 외에도 위만조선의 존재도 동북공정의 중요한 내용이 된다. 위만조선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BC 195년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에 반기를 들고 흉노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연지방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지역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가운데 위만(衛滿)도 무리 약 1천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위만은 BC 194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우고, 수도인 왕검성(王儉城)에 입성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패배한 준왕은 뱃길로 한반도 남부로 가서 한왕(韓王)이 되었다.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위만조선이라고 부른다. 네이버 백과사전의 설명 中 (http://100.naver.com/100.nhn?docid=14543).

물론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러한 역사의 존재 자체가 동북공정 주장의 근거로 사용되기엔 무리가 있다. 기자 또는 위만이 중국의 망명객이었다고 하더라도 후지모리가 페루에서 대통령을 했다고 페루가 일본시가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기자조선의 존재 자체로 고조선이 중국의 역사라 주장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어떠한 역사가 어느 국가의 일부분이었는가는 단순히 지도자의 출신에 따라 결정된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문화적, 지리적, 사회적인 여러 가지 측면에 대한 분석이 더욱 중요하다. 그리고 고조선의 역사 중에서 잠시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2000년 이상의 고조선의 역사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중국의 주장은 어느 특정한 한 시기의 일면만을 과장하여 해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고구려에 대한 관점

참고문헌
고구려연구회, 『동북공정과 한국학계의 대응논리』, 여유당
이천석, 『중국 동북공정에 관한 연구』, 2009
이선민, 『한,중 초등학교 사회교과서 역사영역 비교분석』, 2007
양지영, 『동북공정에 대한 한국학계의 대응』, 동국대 교육대학원
김부식, 『삼국사기』 권 제23, 29. (www.krpia.co.kr)
우실하,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 소나무, 2007.
여운건, 오재성, 『동북공정과 고대사 왜곡의 대응방안』, 한국우리민족사연구회, 2006.
中國社會科學院 東北工程辨公室, 延邊大學 역, 『2005년도 중국의 고구려사 연구 논문집』, 동북아역사재단, 2007.
김정희, 『중국학계의 발해국, 발해사의 정체성 인식』,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와 그 한 계』, 국사편찬위원회, 2004.
박선영, 『중국학계의 조선과 청조 간 국경 영토논리와 그 한계』,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 와 그 한계』, 국사편찬위원회, 2004.
이인철, 『중국의 고구려역사편입과 한국의 대응전략』, 『백산학보』, 제67호, 2003.
최광식, 『이달의 초점 - 동북공정]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대응방안』, 『북한』, 북한연구소, 388호, 2004.
편집부편, 『중국의 동북공정과 우리의 대응방향』, 『한국전략문제연구소 정책토론 제122차 결과보 고서』, 2006.
홍승현, 『중국학계의 고민족 인식과 동북연구의 새로운 경향』,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와 그 한계』, 국사편찬위원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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