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회] 천주교와 유교의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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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사회] 천주교와 유교의 대립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 眞理와 倫理의 대립
-安鼎福의 天主敎 비판-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외국 선교사가 아니라 서적을 통하여 처음으로 서양사상에 접하였다. 서양사상은 천주교 선교책자들을 통하여 18세기 초에 상당히 많은 조선인의 주목을 끌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익(李瀷)과 같은 학자가 여러 가지 예수회 서적들에 대해 언급하였고 영세를 받은 최초의 조선인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익은 한국의 초기 천주교회사에서 중요한 인물로서 천주교에 대한 사제들의 주장과 천주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조선의 초기 천주교인들이 그의 제자 가운데에서 나왔으며, 또 일부 제자들은 천주교와 천주교인들을 극렬하게 비판하였다.
천주교를 처음 믿은 조선인은 대부분 남인(南人) 양반이며 이익(李瀷) 사상의 추종자들이다. 초기 천주교를 조선왕조의 붕당정치에 대한 불만의 표출로 이해하는 해석은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정조(正祖)의 재위기간(1776~1800) 동안 남인은 천주교인 여부를 불만하고 관계(官界)에 많이 등용되었기 때문에, 정치적 좌절이 남인의 정치가와 학자가 천주교에 몰두한 주요 요인이 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초기 천주교인들 가운데 남인이 많이 포함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천주교에 대한 첫 박해는 1785년에 있었고 1800년 최초의 전면적인 박해가 일어났는데 이때 3백명 이상의 천주교인들이 처형되거나 고문으로 죽었다. 1801년 이후에 천주교에 대한 조선의 대응은 이전까지의 지적 대응과는 상이하다. 이제부터 18세기 서양의 도전에 맞서 유교 정통을 수호하려고 한 대표적 인물인 안정복(安鼎福:1712~1791)의 반응을 살펴 보고자한다.
안정복은 이익의 제자이며 남인의 존경받는 학자였다. 1785년에 그는 천주교의를 신유학 관점에서 비판한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저술하였다. 그가 73세에 붓을 들어 천주교의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로 결심한데는 아마 세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첫째, 자신과 가까운 친구와 친척들이 유교 전통에서 이탈하는 일에 충격 받고 낙담했을 것과 둘째, 다른 붕당들이 천주교를 자신의 남인세력을 공격하는 구실로 삼을 것이라는 우려와 마지막으로 셋째, 이익의 명성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안정복의 ‘천학문답’은 천주교 사상과 그 실천의 본질에 관하여 묻는 30개 문항에 대해 그가 답하는 문답체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교에서 요구하는 ‘하늘’을 올바로 섬기는 방식을 제시해 주는 ‘하늘’의 진정함 가르침이라는 천주교 측 주장을 자신에게 묻고 나서, 천주교는 비윤리적ㆍ비합리적ㆍ비논리적ㆍ반사회적ㆍ비현실적ㆍ이기적ㆍ미신적이라고 응답하였다.
천주교에 대한 안정복의 반응은 마치 그가 당시 이데올로기에 대한 어떠한 도전에도 맹목적으로 반발하기라고 한 것처럼 지극히 배타적인 것으로 해석되어 왔고 조선이 20세기에 들어와서 일찌감치 서양사상을 받아들여 근대세계로 진입하지 못한 것이 이러한 조선유학의 보수적, 배타적 성향 탓이라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것은 18세기 안정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