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대의 군사제도와 국방정책 세종 군사제도, 세종 국방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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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종시대의 군사제도와 국방정책 세종 군사제도, 세종 국방정책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세종시대의
군사제도와 국방정책
-목 차-
Ⅰ.머리말
Ⅱ.정치 사회적 배경과 군사정책의 향방
Ⅲ.군사제도
Ⅳ.국방정책
Ⅴ.병조 보강과 군정 정돈
Ⅵ.맺음말
Ⅰ.머리말
부국강병[富國强兵]. 나라의 살림을 넉넉하게 하고, 군사력을 튼튼하게 한다는 말이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국가경영의 근간이다. 반만년 한반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성왕으로 꼽히는 세종 역시도 치국의 목표를 부국강병으로 두었을 것이다. 세종은 한글창제를 포함하여 정치, 경제, 문화, 과학, 예술 등 사회 모든 분야를 총망라하여 위대한 업적을 세웠다. 군사적인 업적 역시, 대마도정벌과 북진개척, 이 두 가지만 보더라도 위대한 과업을 이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수업을 통해 대마도정벌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통쾌하게 싸워 쟁취한’ 승리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간다는 것을 알고는 실망감에 빠졌었다. 그러나 지난해 한 회도 거르지 않고 시청했던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이 전승의 신기에 가까운 위업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 200여 년 전 세종 대에 정비해 놓은 화포제작의 결실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일전의 실망감이 모두 해소되었다. 실제로 4군 6진의 북방 영토의 확장은 군사제도와 국방체제가 잘 짜여져 운영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세종 시대의 평화와 정치적 안정 또한 태종 때에 이어 군사제도와 국방체제를 잘 갖추어 놓았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나 역시 마찬가지지만 일반적인 통념이, 학자다운 면모가 두드러지는 세종은 문치에만 치중하여 군사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한 우를 두 번 다시 범하지 않기 위해서 세종 대의 군사제도와 국방정책에 대해 조사할 필요를 느꼈다.
Ⅱ.정치 사회적 배경과 군사정책의 향방
세종 시대의 군사제도를 보다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사회 분위기를 훑어 볼 필요가 있다. 이 시기 군사 정책의 향방은 정치 사회적 여건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종 시대는 태조 이후 정종과 태종을 거치는 1세대에 가까운 기간이 지나서야 새 왕조의 기틀과 정치적 안정을 이룩할 수 있었다. 세종 시대가 정치적 안정은 공신의 책봉 책봉 : 왕세자나 왕세손 및 후(后)·비빈(妃嬪) 등을 봉작함.
이 없었다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조선 건국 이후 새로운 왕이 즉위할 때마다 개국공신, 정사공신, 좌명공신이 책봉되었는데 왕에게 정치적으로 부담을 주는 책봉이 세종 시대에는 없었던 것이다. 정치적 안정은 사회적 안정을 뜻하며, 그것은 민생의 평안으로 이어졌다. 오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사라지고, 새로운 왕이 정치기강을 바로잡아 적극적인 위민 정책을 펼침으로써 조선 사회는 안정과 발전을 이룩하여 백성들의 삶이 진전되고, 국가재정도 부실해질 수 있었다. 세종 시대에 4군 6진을 개척하여 영토를 크게 넓히고, 집현전을 설치하고 한글 창제를 비롯한 수많은 문화적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힘이 바로 정치적 안정의 바탕 위에서 나온 것이다. 이 시기의 정치적 안정은 군사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려말엽 이후 국제환경의 변화와 외적의 빈번한 침입으로 수많은 전쟁이 있었고, 왕조교체에 따른 정치적 대결과 무력 충돌이 야기되었다. 그 결과 무장이 유력한 지위를 차지하였고, 군사력이 정치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태종 때에 사병을 혁파하는 등 여러 시책을 펼치며 병권을 강력한 왕권 아래 예속시키는 조치를 취하였으나, 유력한 무장과 군사들을 세력기반을 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사정이 달라진 것이다. 세종 정권은 더 이상 군사력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중앙군이 감축되고, 무신의 지위가 약화되었다. 국방에 대처하는 지방군이 조직이 정비되지만, 커다란 국가 통치체제의 틀 속에서 평화를 구가하던 현실이 반영될 수 밖에 없었다.
Ⅲ.군사제도
세종 말년에 군역의 파악방식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440년(세종 22년) 3,000명에 불과하던 갑사(甲士) 갑사 : 조선 시대에 각 고을에서 뽑혀 와 서울의 수비(守備)를 맡던 의흥위(義興衛)의 군사.
가 1449년에는 7,500명으로 증가하고 중앙군의 각 병종은 대폭적인 증가를 보이게 되었다. 이와 함께 번차 번차 : 번을 드는 차례.
가 많아지고 상경하여 복무하는 기간은 매우 짧아지게 되었다. 또 소집되지 않는 중앙군은 모두 지방별로 거주지의 진영에 등록토록 하여 고을별로 수령의 관리를 받게 함으로써 지방군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세종 말기부터 문종 초기에 북방 변경의 소란과 방어 필요 때문에 촉진되었다. 이러한 체제는 결국 세조 때 진관체제로 정비되어 중앙군과 지방군을 일원적으로 관리하게 되었다.
군사의 기초가 되는 인정(人丁 16-60세의 성인 남성)의 수는 태종대에 30만 명 정도에 불과 하였으나, 세종대에는 꾸준한 민생 안정 정책과 호구에 대한 효과적인 관리로 인정의 파악이 70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그만큼 병력 자원이 많아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세종 당시에는 정군과 보인(保人)을 합하여 군정(軍丁)의 수는 약 30만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