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정치에 대한 자신의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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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세종의 정치에 대한 자신의 견해]
조선시대에는 500년이라는 긴 시간만큼이나 훌륭했던 왕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나라발전에 힘쓴 왕을 한명 꼽는다고 한다면, 망설임 없이 세종대왕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세종대왕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보면 휘는 도요, 자는 원정으로 1497년 4월 10일 한성부 북부 준수방에서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종은 1408년에 충령군으로 봉해졌고, 1413년 충령대군이 되었으며, 1418년 6월 17일 세자로 책봉되었고, 같은 해 8월 10일 왕위에 올랐다. 세종의 성격은 어머니를 많이 닮은 것 같다. 아버지인 태종이 용맹스럽고 호전적이며, 과단이 있는 데 비하여 세종은 신중하고, 조심성 있고, 인내심이 강하며 끈기가 있었다. 또 세종은 기억력도 비상하여, 책을 읽으면 잊어버리지 않고, 신하들의 이름이나 가계를 모두 기억하였으며, 스스로도 자신의 재주를 믿었고, 자신만만한 말솜씨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말솜씨가 좋고 논리적이었으며, 참을성이 많고, 화를 잘 내지 않았던 세종이 조선이라는 한나라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일을 추진하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는 하고자 하는 일은 결단력을 발휘하여 끝까지 밀고 나가는 과단성과 추진력을 가지고 있었다. 세종은 32년 동안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나라 안팎의 정치, 문화 등에 크게 이바지하여, 우리나라 임금 가운데에서 가장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세종대왕이 이러한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크게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대에는 3가지 정신을 바탕으로 국가를 경영하였기 때문이다. 이 3가지 정신이란 바로 애민정신, 자주정신, 과학정신이다. 지금부터 이 3가지 정신을 바탕으로 세종이 펼친 정치에 대해 알아보고 내 견해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다.
첫째 애민정신은 인간 존중의 철학이자 인도주의 정신이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서문에서,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아니하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하고자 하는 말이 있어도 그 뜻을 표현해 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므로 내가 이를 딱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드니 온 백성이 쉽게 익혀서 언어 문자 생활을 편하게 함에 있다라고 하였다. 이 뜻은 일반적으로 임금이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과 같은 과거 봉건군주들의 말로만 하는 애민이 아닌 남다른 성현의 덕성과 인격을 아울러 갖춘 인간 세종대왕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그야말로 몸소 실천하는 방법으로 사람을 사랑하신 세종대왕의 인간성의 노출인 것이다. 당시 거센 유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생각을 펴지 못함을 어여삐여겨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일반 서민에 대한 애민정신이 어떠하였는가를 한번 더 확실히 알 수 있었고, 당시 백성들의 의식과 감성을 살핌이 얼마나 세심하였는지 엿볼 수 있었다.
어진 정치를 실천하기 위해 세종대왕은 통치의 최고 목표를 생민의 안정에 두었다. 인간 존중이나 애민사상이 관념으로서만 머무르지 않고 실제의 정치에 반영해야 했었던 세종은,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민 모두가 정신적으로도 푸짐하여야 하고 물질적으로도 푸짐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정신적·인간학적 진리 추구의 방향과 구체적 현실의 경제생활을 주안으로 하는 언어 문자 정책과 농업 정책 및 국민 보건 위생을 고려하는 의약 정책이나 환과고독, 폐질자, 천민 등을 위하고 민의를 수렴하는 사회 정책 등을 펼쳤다. 이러한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세종이 어느 한 면도 소홀히 하지 않고 용의주도하게 완급을 따져서 정책에 반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인권을 옹호하며, 노비·천민이라 할지라도 삶의 권리를 누리게 한다든지 죄수라 할지라도 남형, 사형, 태형을 금하고, 사형 죄수에 대하여는 삼복제를 실시한 것 등은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려는 현대 근대정신의 선구일 뿐만 아니라, 인류사에 빛나는 대선각자라 하겠다.
둘째, 자주정신은 주체 자주정신이다. 세종대왕의 정치철학은 주체에서 우러난 자주정신인 것 같다. 세종은 내정에 있어 경제·정치·사회·문화·예술·과학 등에 이르기 까지 인습적 교조주의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정확하고 철저하게 연구 시행하여 영구 불멸의 정신문화와 물질문화를 진흥하는데 이바지 하였다. 외치에 있어서도 명나라와의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는 한편, 영토를 확장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는데, 북으로 육진·사군을 두고 국경을 확정하였으며, 남으로 대마도를 정벌 계림부에 예속시켰다. 왜구에게는 군사적 강경책을 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삼포를 개항함으로써 불필요한 싸움 없이 나라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같이 세종은 문무를 겸비하여 현실적 정책에 만전을 기하 하였던 것 같다.
세종대왕의 정책 결정의 원칙을 말하면, 앞의 내용에서도 나타나듯이 안민과 보국을 주축으로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안민과 보국을 위한 정책 실천 방법에 있어서 두 가지 원칙을 고려하였는데, 이는 바로 실리 추구와 정의 구현이었다. 세종대왕은 실리가 된다고 하여 정의를 망각하지 않았으며, 정의를 숭상한다 하여 공허하게 맹목적으로 실리를 저버리지도 않았다. 이 양자가 원만하게 관계를 이루고, 중용을 이룰 때에 가장 진선, 진미 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두만강의 국경을 용성으로 후퇴하려 할 때, 세종은 조종의 국토를 아무리 작은 땅이라도 버릴 수 없는 것이 조상의 뜻을 이어 술책을 잘하는 대의요, 장강의 험지를 이용하는 것이 대리라고 하여, 이(利)와 의(義)를 겸전하려는 것이 그 요령이라 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스스로의 자품이 명민하고 영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여론을 중시하고 군신이 합력하여 진리와 인도를 추구하였다. 세종대왕의 정치 원리는 고루하고 보수적이고 복고적인 인습적 유자가 아니고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며,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개혁의 혁신 정책을 세워 실천하신 어른이었던 것이다.
특히 진실하고 공정한 세종대왕의 자세는 나로 하여금 감탄하고 저절로 머리 숙여지게 한다. 부왕의 실록인 태종실록을 춘추관에서 거의 이루었을 때, 세종대왕이 이를 보고자 하므로, 맹사성은 "성상께서 보신다 하더라도 고칠 것이 없고, 만들기 전에 보았다는 말만 들을 것이오니, 보시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하매, 세종은 그 말을 옳게 여겨 보지 않았다 하니, 세종의 그 정대함이 어떠하였던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세종은 경연에서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집필할 때 임금의 착한 것은 기록하고, 착하지 않은 것은 기록하지 않는 일은 옳지 않은 일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 마음의 올바름은 나라와 겨레의 복이 되는 말이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밖에도 세종대왕은 의약을 중국에서 사다 쓰고 우리 약재를 무시하는 폐단을 없애고 향약의 개발을 위하여 전국 팔도의 토질에 맞는 약재를 재배하여 쓰도록 함과 아울러 의서를 찬술 보급시켰다. 또한 아악을 정리하고 악기를 우리 재료와 우리 기술로 만들어 쓰게 함과 아울러 동양 최초의 유량악보인 정간보를 창안하였으며, 도량형을 고정하여 과학적인 생활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셋째 과학정신은 창조적 과학정신이다. 이 정신은 앞에서 말한 정신들 속에도 함께 맞물려 있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문화유산이 고여 있는 문화가 아닌 창조하는 문화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산업, 과학기술 및 정보화 시대에 있어 사고의 합리적 정신을 훈련하여 과학화하고 인권 평등을 전제로 한 민주화 운동이 근대정신의 요체라 한다면, 세종대왕은 인권존중과 합리적 사유를 실제로 실천한 근대정신의 선구라고 생각한다.
세종대왕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조금도 쉬지 않고 열심히 공부에만 열중하였던 사람으로, 임금이 되자 제일먼저 시행했던 것은 인재 양성이었다. 우수한 학식과 풍부한 정치 경험을 겸비한 높은 벼슬아치들과 세자 때의 빈객 중에서 많은 수의 경연관을 임명하여 경연을 즉시 열게 하였으며, 여기에 이어 집현전을 부활, 개편 강화하여 우수한 학자들과 장차 유망한 젊은 학자들을 정선하였다. 세종은 이들이 오로지 학문연구에만 전심 전력할 수 있도록 하여 높은 수준의 학문 경지에 이른 우수한 학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그들도 모두 경연관이 되게 하여 학문을 강론하게 하였다. 한편 학풍을 일으켜 학식을 높이기 위한 정책을 세워 주자소로 하여금 각 분야의 많은 서책을 인쇄하여 보급하려 하였다. 그러나 즉위 당시 인쇄술로는 시정 목표를 성취시키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세종은 먼저 인쇄법의 개혁이 시급함을 깨닫고 몸소 주자소를 방문 의견을 제시하는 등 여러 방법으로 연구시켜 활자와 조판법을 개혁함으로써 국가 생활에 필요한 많은 저술을 편찬, 발간하게 되었다. 주자법과 조판법을 익혀 숙련된 장인들의 기술은 정교한 천문관측기과 자격루를 성공리에 완성시키게 하였고, 이러한 기술 발전의 과정에서 경험한 결과는 조지소의 성공과 새로운 인쇄법을 발명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농업의 과학화를 위해 수차도 발명하려고 하였는데, 신하들이나 장인들이 그 발명이 어렵다고 하자, 세종이 말하기를, "중국이나 왜국(倭國)에까지 모두 수차의 이익을 받는데 어찌 우리나라에서만 행하지 못한단 말인가. 나는 반드시 이 일을 성공시키겠다" 하면서 "사람들이 반드시 성공시켜 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전심전력한다면 반드시 성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꼭 이 일을 맡을 만한 사람을 골라내라"고 명령 하였는데 이 말은 나로 하여금 현대 과학자들이 자연 정복을 위해 미지의 현상과 기술을 개척하려는 도전의지와 완전 일치함을 찾아볼 수 있게 하였다. 이는 당시 세종이 인쇄법 등의 개발에서 시작된 많은 과학적 경험 속에서 얻은 결론을 한 마디로 정리한 것으로서, 이미 훌륭한 과학자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음을 입증해 주는 것 같다.
또 세계 최초인 측우기를 발명하게 된 그 경위 또한 살펴보면, 옛날에는 임금에게 강우량의 보고를, 막연히 비가 홍수나게 많이 왔다든가 흡족하게 왔다든가 조금 왔다는 등의 추상적인 보고를 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세종은 빗물이 땅속에 스며든 깊이의 척촌수로써 계량적인 보고를 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땅 속의 건습차로 정확성이 떨어지게 되자 지하로 들어간 빗물의 척촌수를 지상에 빗물을 고이게 하여 그 고인 물의 척촌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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