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교육론 김구용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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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문학 교육론 김구용 시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김구용(본명: 김영탁)은 1922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김구용이 태어날 당시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물려온 재산으로 유족하게 살았다. 부유한 대지주의 4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집에서 부모와 함께 살면 5살을 넘기지 못하고 단명한다 하여 4살 때 유모와 함께 금강산 표훈사의 암자인 마하연에서 살았고, 5년 동안 불보살님께 지심정례至心頂禮를 드리기 시작했고 절에서 대사에게 글과 불경을 배웠다. 그의 형제들 또한 일본으로 유학가서 방학동안에만 만날 수가 있었다. 그의 어린 시절의 이러한 삶은 시세계에도 나타나 있는 바, 고향을 몹시 그리워한다거나 부모에 대한 애정이 표현된 시가 적은 것도 이와 무관한 것이라고만 할 수 없을 것 같다.
김구용이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9세 때로 와 등의 잡지를 구독하면서부터이다. 그의 회고담에 의하면, 본격적으로 그가 문학에 매달리기 시작한 것은 11세 때라고 한다. 집안이 비교적 유족하여 자유롭게 책을 구입해 볼 수 있었고, 그의 형들이 구입한 문학서적들을 읽으면서 그는 문학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
그 후 대구, 서울, 수원 또 서울 등지에서 보통교육을 받았고 사이사이에 신병 치료 차 암자에 가서 요양을 했다. 김구용의 문학수업의 대부분은 그가 어려서부터 들어가 기거하게된 절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신에 의해서 들어간 것이 인연이 되어 그는 신병의 요양을 위해서, 또는 일제하의 강제 징용을 피하기 위해서 절에서 생활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절에 머물면서 불교 경전과 동서의 고전들을 섭렵했고, 시작에 정진했으며 동양 고전을 번역했다. 이 때에 읽은 책들이 자신의 시작세계를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그는 회고하고 있다. 그의 자신의 시적 바탕은 동서양의 고전이라고 강변하기도 하고, 그의 난해시의 근원은 노장(老莊)이나 불경(佛經)에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산사에서 프랑스의 폴 발레기의 작품 등을 통해 상징주의 계열의 시와 릴케의 시를 주로 읽으면서 초현실주의에 눈을 떴다. 그리고 정지용, 한용운, 서정주, 이상 등에 심취하기도 했다.
김구용의 문단 등단은 1949년 김동리의 주선으로『신천지』에 시「산중야」를 발표하면서부터 이며 그해 성균관대학에 입학했다. 1950년 전쟁의 와중에『사랑의 세계』지와『현대문학』지 기자로 근무하면서 왕성한 시작활동을 했고 전쟁 때 피난처인 부산에서 가난과 고통을 체험했다. 부자 집 아들로 태어나 가난과 고생을 모르던 선생의 부산피난체험은 이후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대학 졸업 후 육군사관학교, 서라벌예대, 건국대, 숙명여대, 성균관대 등에서 시간 강사로 전전하다가 성균관대 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70세까지만 글을 쓴다고 늘 말해왔기 때문에 1990녀도 이후에는 일절 시작 발표를 하지 않았다.
2001년 12월, 제36회 월탄문학상을 수상하였고, 같은 달 28일, 노환으로 서울 성북구 동선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시집과 산문집, 역서가 있는데, 시집으로는『시詩』『구곡九曲』『송백팔頌百八』『구거九居』등이고 산문집은『인연因緣』『구용일기丘庸日記』등이 있으며 미발표된 일기도 있다고 한다. 한학에 조예가 깊어 동양고전의 역서가 많은데,『채근담採根譚』『옥루몽玉樓夢』『삼국지三國志』『노자老子』『수호전水滸傳』『열국지列國志』등이 있다.
Ⅱ. 작품경향 및 주요작품 해설
초기
관조적 태도에서 객관 세계로의 지향
참고문헌
참고문헌
-한국 전후 문제시인 연구 03, 김학동 외, 예림기획, 2005.
-한국 현대 시인론2, 최승호 박현수 엮음, 2005.
-시의 논리, 현실의 논리- 김구용의 시집 시(詩)를 중심으로, 홍갑선.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