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모던보이 편석촌片石村김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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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김기림[본명은 인손, 호는 편석촌(片石村)]1908년 5월 11일 함경북도 학성군에서 6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아버지가 수완이 좋은 사업가였던 탓에 유복하게 자랐지만, 8살이 채 되기 전에 어머니와 셋째 누이를 잃게 된다. 이런 어린 날의 경험이 그의 시 전반에 흐르는 감정주의를 극도로 배격하는 태도를 보이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나는 열다섯 살 때에 중학교의 작문 선생으로부터 애가 이 뽄으로 글을 쓰다가는 필경 자살하겠다.하는 경고를 받은 일이 있다. 그 때의 공부하던 누이와 그리고 어머니, 내가 여덟 살이 채 차기도 전에 나의 어린 날을 회색을 물들 여 놓고는 그만 상여를 타고 가 버렸다. 잔인한 분들이었다. 한 없이 쓸쓸하였고 고독하였던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나로 하여금 이러한 어린 날에 대한 비속한 현실주의자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본래의 정체는 역시 감상주의였다. 내가 오늘날 감상주의를 극도로 배제하는 것은 나의 영혼이 죽자고나 하고 하는 고투의 표현이기도 하다. 물론 굳은 시대의식에서부터도 나오는 일이 기도하지만-(김기림, [사진 속에 남은 것], 전집 5, 315면
김기림은 13살 때 성진보통학교의 부속 농업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14살 되던 해에 서울에 유학하여 보성고보에 입학하게 된다. 거기에는 임화, 이헌구, 윤곤강, 이상 등 장래의 문인들이 여럿 있었다. 그 중에서 후에 구인회에 가입한 이상(李霜)과의 사이는 남달라서 김기림이 그의 시론에서 이상의 시를 널리 호평한다거나 1936년에 김기림이 학업을 위해 재차 도일하자 이상이 시집 『기상도(氣象圖)』의 교정을 맡을 정도였다. [이상과 1930년대 경성의 ‘모던 뽀이’들] [3]기자 김기림 ‘천재 이상’ 멘토 되다.(조선일보 2010. 01.09 문화종합면)
탁월한 성적으로 학교를 다니던 기림이지만, 둔종(臀腫)이 발병하여 휴학하게 되고 1925년에 일본으로 가 메이쿄(名敎) 중학교에 편입한다. 그 이듬해에 검정시험에 합격한 김기림은 니혼(日本) 대학 문학예술과에 입학하게 된다. 이 일본유학시절에 김기림은 당시 일본 문단 계에 가장 큰 자극제였던 모더니즘운동을 접하게 된다.
그의 문단생활은 1930년에 시작된다. 당시 재직 중이던 조선일보사에 「가거라 새로운 生活로(조선일보.1930,06)」를 발표하는데, 이때의 시는 아직 시적 완성도는 미미하지만 여기에서 나타난 문명어의 자유로운 구사나 이미지즘과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 특색들은 김기림의 시 창작 전반에 계속해서 이어지게 된다.
1931~1932년에는 「고대(苦待)(1931)」, 「날개만 도치면(1931)」등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활동을 활발하게 하기 시작하고, 이런 시들을 통해 주목 받기 시작한다.
1933년에는 이종명과 김유영의 발기로 조직된 에 가담하는데, 처음에는 단순한 친목적인 모임이었던 구인회는 점차 이양하, 최재서 등과 함께 주지주의 문학이론을 우리나라 문단에 도입하여 한국적 모더니즘 문학운동의 선구자가 되는 계기가 된다.
1936년 에 조선일보를 휴직하고 토오호쿠 제국대학(東北帝大) 영문학과에 입학하여 첫 시집 『기상도(氣象圖)』를 간행한다. 그리고 1939년 대학교를 졸업하고 두 번째 시집인 『태양의 풍속』을 간행한다. 이 당시의 일본 유학은 영미문학의 방법이던 ‘과학적인 시학’을 수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순진 편, 『새미작가론총서10-김기림』, 새미출판사, 1999. 中 ‘김기림 문학의 영향관계 고찰’
기타 논문들의 면면마다 김기림이 I.A.리차즈의 제자인 Willam Empson 교수에게 사사 받았다는 내용들이 있다.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이르러 일제의 압정이 더욱 더 가혹해지자 조선일보가 폐간되고(1940) 경성 중학교의 교사를 거쳐 서울대, 중앙대, 연세대의 전임교수 생활을 한다.
해방 이후 그는 김광균 등과 함께 조선 문학가 동맹(1945)에 가담하여 다시 활발한 문단활동을 한다. 1946년에 나온 세 번째 시집 『바다와 나비』, 평론집 『문학개론』 등이 이 시기의 주요한 작품들이다. 그러나 애초에 인도주의자였던 그는 조선 문학가 동맹에서 강요하는 계급주의, 문학의 정치적 도구화에 반발하여 1948년 미군정의 치하에서 벗어나자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전향 선언을 한다.
6.25 전쟁 발발 후 피난하지 못하다가 납북되었고 한동안 금지된 작가였다가 1988년 김기림 문학 및 기타에 대한 전면 해금이 단행됨으로 인해 김기림 기념 사업회가 발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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