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국가경영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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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세종 장헌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의 휘는 이도(李)요, 자는 원정(元正)이니,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의 세째 아들이요, 어머니는 원경 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이다. 태조(太祖) 6년 정축 4월 임진에 한양(漢陽) 준수방(俊秀坊) 잠저(潛邸)1)
에서 탄생하였으니, 명나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홍무(洪武) 30년이다. 영명(英明) 강과(剛果)하고, 침의(沈毅) 중후(重厚)하며, 관유(寬柔) 인자(仁慈) 공검(恭儉)하고, 또 효도하고 우애함은 천성이 그러하였다. 태종 8년 무자 2월에 충녕군(忠寧君)으로 봉하였고, 우부대언(右副代言) 심온(沈溫)의 딸과 결혼하여, 그를 경숙 옹주(敬淑翁主)로 봉하였다. 13년 임진 5월에 충녕 대군(忠寧大君)으로 올려 봉하고, 18년 무술 6월 임오에 태종이 개성에 머무를 제, 문무 백관들이 세자 이제(李)가 잘못이 많다 하여, 글을 올려 폐하기를 청하매, 태종이 제의 맏아들로써 계승하게 하려 하였으나, 여러 신하가 모두 아뢰기를,“전하께옵서 세자를 교양하심이 극진하셨건마는 오히려 이러하니, 이제 어린 손자를 세운다면 어찌 앞날의 무사할 것을 보장하오리까. 하물며 아버지를 폐하고 아들을 세움이 의리에 어떠하올지. 청컨대 그 중 어진이를 골라서 세우시기를 바라옵니다.”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그러면 경들이 마땅히 어진이를 가리어 아뢰라.”하니, 여러 신하들이 함께 아뢰기를,“아들이나 신하를 알기는 아버지나 임금과 같은 이가 없사오니, 가리는 것이 성심(聖心)에 달렸사옵니다.”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충녕 대군이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 비록 몹시 춥고 더운 날씨라도 밤을 새워 글을 읽고, 또 정치에 대한 대체(大體)를 알아, 매양 국가에 큰 일이 생겼을 제는 의견을 내되, 모두 범상한 소견이 의외로 뛰어나며, 또 그 아들 중에 장차 크게 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자가 있으니, 내 이제 충녕으로써 세자를 삼고자 하노라.”하였다. 여러 신하가 함께 아뢰기를,“신들의 이른 바 어진이를 골라야 한다는 말씀도 역시 충녕 대군을 가리킨 것이옵니다.”하였다. 의론이 이미 정해지매, 곧 그를 세워 왕세자를 삼고, 백관에게 명령을 내려 들어와 하례를 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를 보내어 종묘(宗廟)에 사유를 고하고 교서(敎書)를 중외(中外)에 내려 죄인을 석방케 하니, 그 글에 이르기를,“세자를 세움에 있어서 어진이를 가림이란 고금에 커다란 의리이고, 죄가 있을 제는 의당 폐하여야 함은 국가의 마련된 법이다. 일은 한 가지에 얽매이지 않고 이치에 알맞게 할 따름이니, 내 일찍이 맏아들 제()를 세워 세자를 삼았으나, 나이가 이미 장성하였으되 불행히 학문을 사랑하지 않고 음악과 여색에 마음이 쏠리었으매, 내 처음에는 그가 젊은 만큼 나이가 장성하면 아마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길을 찾으리라 바랐더니, 이제 나이가 스물이 넘도록 오히려 군소배와 사통하여 의롭지 않은 일을 방자히 저지르다가, 지난해 봄에 일이 발각되어, 죽음을 당한 자가 두어 사람이나 되었으매, 제()가 그제서야 그 허물을 상세히 기록하여 종묘에 고하고 나에게 글을 올려 마치 스스로 뉘우치는 듯이 하더니, 얼마 아니 되어 또 간신 김한로(金漢老)의 음모에 빠져서 다시 전철을 밟게 되었다. 내 부자의 은정으로써 다만 한로를 쫓아내었으나, 제는 오히려 고치는 마음이 없을 뿐더러, 도리어 원망과 노염을 품고서 분연히 글을 올렸으되, 사연이 매우 패려하고 오만하여 전연 신자의 도리가 없었으므로, 이제 정부의 훈신들과 육조(六曹)·대간(臺諫)과 문무 백관이 함께 이름을 적어 글을 올렸으되, ‘세자의 행실을 보아서는 대통을 이어받아 종사를 주장하여 중대한 책임을 질 수 없겠사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위로는 태조께옵서 초창하시기에 어려웠음을 생각하시고, 또 종사 만대의 대계를 염려하시며, 아래로는 대소 신료의 바라는 바를 살피시와, 공의(公義)로써 영단을 내리시어, 세자를 폐하여 밖으로 추방하시고, 종실 중에 어진이를 골라 세자로 세워서 인심을 안정시켜 주시옵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충녕 대군이 영명(英明) 공검(恭儉)하고, 효우(孝友) 온인(溫仁)하며, 학문을 즐겨하여 게을리하지 않사오니, 진실로 세자의 망(望)2)
에 합당합니다.’ 하므로, 내 부득이 제를 밖으로 추방하고 충녕 대군 이도(李)를 세워 왕세자를 삼게 되었으니, 아아, 옛사람의 말씀에 이르기를, ‘화나 복이 모두 제 자신이 부른 바 아님이 없다.’ 하였으니, 내 어찌 이에 털끝 만큼이라도 애증의 사심이 있으리오.”하였다.
갑신에 세자에게 궁(宮)을 주고 교지로 부인 경숙 옹주(敬淑翁主)를 경빈(敬嬪)으로 봉하였다. 병신에 태종이 정전(正殿)에 나와 세자를 책봉하니, 그 책문에 이르기를,“세자를 세움은 인심에 관계되는 것이매, 실로 큰 전칙(典則)이 되는 것이다. 원량(元良)을 가리어 나라의 근본을 바로잡으려 할진댄, 오직 지공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이 명(名)과 위(位)의 높음을 바르게 하여 책봉의 예식을 거행하노니, 너 충녕 대군 도는 관홍(寬弘)·장중(莊重)하고 효제(孝悌)·겸공(謙恭)하여, 사랑과 공경으로써 어버이를 섬기되, 아무 때에라도 조심조심하며, 총명한 자질에 배움을 즐겨하여, 날마다 부지런히 부지런히 하여, 나라 일을 부탁함에 합당하고, 신하와 백성이 우러러 소망을 둘새, 이러므로 너를 책봉하여 왕세자를 삼노라. 아아, 하늘이 밝은 덕을 돌보시고 귀신이 그 정성을 흠향하니, 제사를 맡아 계통을 잇되 늘 책임이 어렵고도 큼을 생각하여, 깊은 못에 다다른 듯이, 얇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하여야 길이 복록을 누리리라.”하고, 경빈에게 책문을 내리기를,“공의(公義)를 따라 원량(元良)을 세우니, 세자의 자리가 곧 정해졌고, 배필을 신중히 하여 종사를 받드니, 위호(位號)를 마땅히 높여야 할 것이다. 이에 아름다운 칭호로써 떳떳한 법전(法典)을 따르노니, 아아, 너 심씨(沈氏)는 곧고 아름다운 성품과 단정한 몸가짐으로 늘 공경함과 두려운 마음을 지녔고, 일찍이 근검한 덕이 현저하여 능히 부도(婦道)에 도타왔으니 한 집안 식구 됨에 합당한지라, 이에 좋은 날을 가리어 대례의 절차를 이에 갖출새, 이제 신하 아무를 보내어 경빈에 책봉하노니, 정숙하고 화기롭게 힘쓸지니 정성은 남편이 정치에 근면하기를 권고하고 돕기에 간절히 하여, 힘써 서로 받들 것이며, 자손이 번창하여, 상서로움이 더욱 클지어다.”하고, 또 국내에 대사(大赦)하는 교서를 내리기를 ‘세자를 세워 근본을 확정함은 종묘를 받들고 인민의 마음을 안정시켜 일만 세대의 앞날을 위해 꾀함이었노라. 옛날 주 문왕(周文王)이 백읍고(伯邑考)3)
를 두고서 무왕(武王)4)
을 세웠음은 오직 그가 어질기 때문이었다. 모든 신하에게 자문하여 비로소 아들 도()를 세워 왕세자를 삼고 이미 온 나라에 포고하였거니와, 전례(典禮)5)
를 상고하건대, 마땅히 책봉을 행해야 할 것이매, 곧 영락(永樂) 16년 6월 17일에 책보(冊寶)를 주었으니, 이러한 거룩한 행사에 부쳐 마땅히 너그러운 은전을 선포할 것이다. 아아, 이미 원량(元良)을 세워 귀신이나 사람의 바람을 위로하게 되니, 비로서 티와 때를 씻었는지라, 한편으로 널리 용서하는 은택을 베푸노라.”하였다. 임금6)
이 글을 올려 사례하기를,“조회에서 책봉하는 대명(大命)을 내리시어 세자를 세워 나라의 근본을 바로잡으실 제 그릇 신의 몸에 이르오니, 송구한 마음 진실로 간절하오며 더욱 감격하옴이 깊사옵나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 도()는 식견이 천박하옵고 성품이 우매하와, 부모를 모심에 승순(承順)하는 도리를 알지 못하옵고, 경전(經傳)을 스승에게 받았으나, 깊고 오묘한 뜻을 밝게 연구하지 못하옵더니, 뜻밖에 거룩하신 은혜가 이 누추한 몸에 깊이 젖게 하옵시니, 대개 주상 전하께옵서는 장엄하옵시고 정대하옵시며 깊고 밝으시온데, 임금의 자리는 반드시 돌아갈 곳이 있고 민심은 미리 정한 바가 있다 생각하시와, 드디어 이 변변하지 못한 저로 하여금 높은 지위를 받게 하옵시니, 신은 삼가 마땅히 맡기신 책임이 가볍지 않음을 생각하여 길이 보전하기를 싫어하지 않으며, 지극히 간절하옵신 교훈을 받들어 영원히 잊지 않사옵기를 맹세하옵나이다.”하였다. 7월 임자에 태종이 임금에게 명하여, 서울에 가서 종묘에 배알케 하였다. 태종이 일찍이 선위할 뜻이 있더니, 여섯 대언(代言)이 울며 아뢰기를,“이는 저희 신하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옵나이다.”하니, 태종이 말하기를,“이 뜻을 드러내지 말라.”고 하였다. 정축에 태종이 개성으로부터 서울에 돌아와, 8월 초8일 을유에 경회루(慶會樓) 아래에 나아가, 지신사(知申事) 이명덕(李明德) 등을 불러 말하기를,“내 왕위에 있은 지 이제 이미 19년이 되었는데, 밤낮으로 늘 송구스러운 마음에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었다. 위로 하늘의 뜻을 보답하지 못하여 여러 차례 재변이 나타났으며, 또 묵은 병이 있어 요즈음 더욱 심하므로, 이제 이 자리를 세자에게 전위하고자 하노라.”하니, 명덕 등이 그것은 될 수 없는 일이라고 힘써 아뢰었으나, 태종이 듣지 아니하고 보평전(報平殿)에 나아가서 내신으로 하여금 임금을 부르되, 두세 번 재촉하고는 상서사(尙瑞司)에 명하여 옥새를 드리게 하였다. 이에 정부·육조·공신·삼군 총제(三軍摠制)·여섯 대언 들이 문을 밀어 젖히고 들어와서, 하늘을 불러 통곡하며, 옥새를 함께 잡아당기어 드리지 못하게 하였다. 태종이 소리를 높혀 명덕에게 신칙하기를,“임금의 명령이 있음에, 신하가 좇지 아니함이 도리에 옳으냐.”하매, 명덕이 부득이 옥새를 바치었다. 임금이 그 부르는 뜻을 알지 못하고 급히 달려 나아가 뵈온즉, 태종이 곧 옥새를 주므로 임금이 엎드려 일어나지 아니하니, 태종이 임금의 소매를 잡아 일으키고 옥새를 주며 곧 안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황급히 옥새를 상 위에 올려놓고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서 지성껏 사양하였고, 여러 신하들도 역시 통곡함을 그치지 않았다. 태종이 환관 최한(崔閑)을 시켜 신하들에게 하교 하기를,“내 이미 국왕으로 더불어 서로 대해 앉았으니, 경 등은 다시 청하지 말라.”하고 임금에게 명하여 옥새를 받아 궁에 머물게 하고, 따라서 붉은 양산을 주고 연화방(蓮花坊) 옛 세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