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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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미학의 개념부터 논해보자면, 미학이라는 학문은, 미가 진이나 선과 구별되며 예술은 과학이나 도덕과 구별되는 고유한 가치의 활동으로서 하나의 독립된 영역을 이루고 있다는 가정하에 성립된 근대적 사고의 소산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미는 일의적인 것이 아니며, 예술이라는 말과 그 말이 대변하는 체제는 18세기에 와서 확립되었습니다. 예술로 번역해서 쓰고 있는 영어의 fine arts가 프랑스어인 beaux-arts를 번역한 말임을 고려할 때 예술은 beauty와 arts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합성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18세기 이전에는 예술이라는 말도 없었을 뿐더러, 현재 그 말로 부르는 인간의 활동(시음악회화조각건축 등)과 미와의 관계가 그다지 긴밀하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고전적 고대로부터 18세기 전까지는 미의 개념에 관련하여 위의 활동이 언급되는 경우가 있더라도 미가 예술만을 통해서 실현되는 가치라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18세기 전까지는 하나의 독립된 영역을 다루는 형식적 교과로서 미학이라는 별도의 학문이 성립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근대적 형태의 미학이론은 없었지만 그러나 미학이론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미학사상들, 곧 미와 나중에 예술이라 부르게 된 활동과 그 소산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고대에도 있었습니다. 형식상 새로운 것일 뿐 미학이론의 쟁점들은 모두 고대로부터 전승된 것들입니다. 따라서 근대 미학이론의 내용을 이루는 고대 미학사상의 중심개념들과 그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우선 검토될 것입니다.
그럼, 이번엔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플라톤은 회화와 시에 대해 각기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회화는 테크네 - 인간적 제작활동 - 의 일환으로 간주했지만, 시는 신적 영감의 소산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런데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도 일종의 테크네 라고 하면서, 시 역시 인간적 제작의 산물로 간주합니다.
시가 하나의 테크네로 간주된다고 할 때, 회화를 비롯한 테크네 일반과 마찬가지로 시를 짓는데도 일련의 규칙이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시의 제작술에 대해 기술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적 테크네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1) 색채와 드로잉을 통해 사물의 시각적 외양을 모방하는 테크네, 즉 회화와 조각과
(2) 운문(verse), 노래, 춤을 통해 인간의 행위를 모방하는 테크네, 즉 시가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와 회화는 모두 모방적 테크네로 간주될 수 있겠는데, 이 두 활동의 차이라면 그 매체입니다.
말하자면, 회화는 색채와 드로잉을, 시는 운문을 그 매체로 사용합니다. 또한 운문으로 쓰여진 모든 것이 시는 아닙니다. 고대에는 시이외의 다른 저술들도 운문으로 쓰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시는 그 대상의 측면에서 역사나 철학과 구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역사는 개별적인 사건을, 시는 인간의 행위를, 철학은 진리를 다룹니다. 또한 시예술이라고 불리는 운문 중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일차적인 관심이 되고 있는 것은 극(희극, 비극)과 서사시인데, 비극과 서사시는 그 행위의 진지함과 엄숙함에 있어서 희극과 구별되며, 다시 비극과 서사시는 그 양식에 있어서 극적이냐 아니면 서술적이냐에 따라 서로 구별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를 보편적 인간행위의 모방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시가 전자의 의미로 전의될 수 있는 이론적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그의 〈시학〉은 이러한 입장에서 시, 특히 비극적인 시가 제작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시가 준수해야 할 규칙을 논한 시의 입법서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시를 보편적인 인간행위의 모방으로 규정함으로써 시가 역사보다 더욱 철학적이라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거부했던 인식적인 자격을 시에 부여하고 있고, 플라톤의 비난으로부터 시를 되살려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에 대해 행했던 방식으로 플라톤의 비난으로부터 회화를 되살려놓고 있지는 않습니다. 즉 〈시학〉에 해당되는 화론을 남겨놓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앞으로 전개될 회화의 운명에 치명적이었습니다. 피타고라스주의자들에 의해 이론적 계기가 부여되기 시작한 음악과 함께 시는 정신적 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긍정적으로 이해되는 데 반해, 회화는 여전히 일체의 존재론적 의미를 찾아볼 수 없는 사이비 기술(kolakeia)로서 순전한 수공의 의미를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즉 신체를 경멸하는 철학적 입장과 신체노동을 하지 않는 귀족정치의 체제 때문에 화가의 사회적 지위는 시인과 같은 것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시를 인간행위의 모방이라고 규정했다고 해서 시와 음악이 곧 회화와 조각과 동류의 활동으로 간주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플라톤의 비난으로부터 회화나 조각이 구제되어야 했습니다. 우선 플라톤의 이원론적 형이상학이 일원론적인 것으로 변모해야 했는데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실체 개념이 회화를 구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철학의 입장에서 회화를 논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철학적 입장에서 회화에 대한 논의는 그리스 문화를 계승하려는 과정에서 수행된 키케로나 세네카의 조각에 대한 논의가 있은 뒤에야 대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