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이해 원나라의 정치사법문화7

 1  중국의 이해 원나라의 정치사법문화7-1
 2  중국의 이해 원나라의 정치사법문화7-2
 3  중국의 이해 원나라의 정치사법문화7-3
 4  중국의 이해 원나라의 정치사법문화7-4
 5  중국의 이해 원나라의 정치사법문화7-5
 6  중국의 이해 원나라의 정치사법문화7-6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중국의 이해 원나라의 정치사법문화7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명의 태조 주원장은 원나라의 정치가 문란하고 국력이 쇠진한 틈을 타 한족 국가 부흥의 기치를 내걸고 1368년 명나라를 세워 중국을 통일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전란에 시달려온 백성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고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감세와 면세를 실시하고 수리사업과 개간사업을 추진하여 생산 촉진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원나라 지배 아래 만연된 여러가지 몽고풍의 제도와 풍습 등을 씻어내고 한족의 문화를 재건하기에 힘썼다.
영락제 때에 이르면 명의 세력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근ㄴ 변방을 침범하는 몽고의 잔존세략을 완전 섬멸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몽고에 친정하였고, 鄭和로 하여금 대선단을 이끌고 동남아시아 일대와 인도양 일대를 개척하게 하여 명나라의 국위를 선양하였다. 영락제는 1421년 수도를 북경으로 옮겼으며 을 편찬하였다.
명나라는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바탕으로 곧 농업생산을 회복하였고 이에 따라 상업과 수공업도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특히 제철 조선 등이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고 요업 같은 수공업은 공장 규모로 발전하여, 여기에서 중국 자본주의의 맹아를 찾는 이도 있다. 그러나 점차 환관이 권력을 잡고 마음대로 정권을 휘두르기 시작하였고, 또 밖으로는 왜구의 끊임없는 침입이 나라를 흔들었다. 그리고 상업의 발전은 부의 불균등한 분배를 가속화하여 대규모의 토지겸병 현상이 일어났다. 이에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대다수가 유민이 되어, 마침내는 여러곳에서 유민들의 폭동이 일어났다. 명말로 오면서 정치는 더욱 부패하여, 이미 世宗의 嘉靖연간부터 시작하여 환관 嚴崇과 魏忠賢이 계속 나라의 권세를 잡아 나라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명나라는 안으로는 잦은 유민폭동이 이어지고 밖으로는 만주족의 침입에 잦아 혼란을 만회할 길이 없었다.
마침내 1644년 농민반란 가운데 세력이 컸던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시키고 숭정제는 목매어 죽음으로써 명나라는 17대 277년 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자성은 북경에 입성한 지 얼마 안 되어 북경에서 쫓겨나고 만주족인 청나라가 결국 중국을 통일하게 된다.
1. 명나라 정치
14세기 중엽, 몽골지상주의(至上主義)를 표방하고 약 100년에 걸쳐 압정(壓政)을 펴온 원조에 항거한 한족 중 가장 큰 집단을 이루었던 홍건적(紅巾賊)에 가담하여 두각을 나타낸 朱元璋은 백련교도(白蓮敎徒)의 뒷받침으로 세력을 펴 양쯔강[揚子江] 하류의 곡창지대를 점령하여 군웅(群雄)을 정복하고, 1368년 금릉(金陵:南京)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명’, 연호를 ‘홍무(洪武)’라 하였다. 그가 명의 태조(太祖:洪武帝)이며, 처음으로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를 채택하고 시정(施政)의 기본방침을 ‘한족의 부흥’으로 삼았다.
같은 해 가을에는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大都:北京)를 함락하여 원의 세력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71년 쓰촨[四川]을 평정하여 전국토를 정복함으로써 사상(史上) 강남(江南)에서 일어나 전국토를 통일한 최초의 왕조가 되었다. 또한 외몽골로 쫓겨 북원(北元)을 세운 몽골민족의 재기(再起)에 대비하여, 다시 둥베이[東北]의 요동(遼東)을 경략하여 몽골과 고려의 연결을 단절하고, 81년 윈난[雲南]을 평정하여 몽골과 티벳의 제휴를 막았다. 88년 남옥(藍玉)을 파견해 지금의 노몬한 부근에서 몽골군을 대파하였고, 그 뒤에도 거듭 이를 경략하여 북원을 쇠망시켰다.
이와 같은 건국사정으로 그의 행정은 몽골적 요소의 제거와 한족 사회에의 적응을 목표로 하고 권력이 일부 관료에 집중하는 것을 피하여 호유용(胡惟庸) ·남옥 이하 노련한 공신(功臣)들을 대거 숙청(胡藍의 獄)하였다. 또한 중앙행정관청인 이(吏) ·호(戶) ·예(禮) ·병(兵) ·형(刑) ·공(工)의 6부를 각각 독립시켜 이를 황제직속으로 하였고, 군사는 五軍都督府, 감찰은 都察院을 거쳐 황제에 직결되도록 하는 등 3권을 분립시켰다.
지방에 있어서도 행정은 포정사사(布政使司), 군사는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감찰은 안찰사사(按察使司)에서 관장하게 하여 3권이 동등한 권한으로 중앙에 직속되었다. 이와 함께 궁중제도도 간소하게 정비하고 특히 환관세력의 팽창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송(宋)나라 이래의 황제 독재권은 더욱 강화되고 율령(律令) ·병제(兵制)도 모두 이러한 방향으로 개정되었다. 당(唐)나라 때 집대성된 율령을 형식 ·내용 등에서 면목을 일신하여 《명률(明律)》 《명회전(明會典)》을 공포, 근대법전의 시행기까지 존속된 법전의 기초를 만들었다.
병제는 당나라 이래의 모병제(募兵制)를 개선하여 징병할 군호(軍戶)를 정하고 위소제(衛所制)를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도지휘사사 밑에 전국의 요소(要所)에 위(衛) ·소(所)를 설치, 여기에 군호의 장정을 분속시켰는데, 1위의 군인은 5,600명이고, 1위는 5개의 천호소(千戶所), 천호소는 10개의 백호소(百戶所)로 구성되어 이를 지휘사 ·천호 ·백호 등이 관장하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제도 가운데 특징을 이룬 것은 몽골의 남침에 대비해서 태조의 아들 등 24명을 왕으로 삼아 요지(要地)에 배치하여 이를 봉건제후(封建諸侯)와 같이 대우한 일이다. 태조는 이들을 교묘하게 조정하여 일단 혈연에 따른 정권보전은 달성하였으나, 북변(北邊)의 왕들에게는 병권(兵權)도 부여하였기 때문에 그 세력이 강대해져서, 특히 베이징[北京]에 있던 넷째 왕자인 연왕(燕王)은 병력을 강화하여 그의 기반을 지방정권화하였다.
태조가 죽고 그의 손자 혜제(惠帝)가 16세로 즉위하여 중앙집권 강화책으로 왕들의 세력을 감축하기 시작하자 연왕은 반란(靖難의 變)을 일으켜 4년 뒤 즉위하였는데, 그가 성조(成祖:처음에는 太宗) 영락제(永樂帝)이다. 그는 대(對)몽골 전략상, 또한 전통적 적대세력의 중심지인 난징[南京]을 피해 베이핑[北平]을 베이징[北京]이라 개칭하여 천도하고 경제적 중심지인 강남지방과의 연결을 위해 대운하(大運河)를 개수하여 대규모 조운법(漕運法)을 확립, 재정적 기반을 굳혔다.
그러나 ‘정난의 병’에 대한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따라 환관을 중용하여 밀정정치(密偵政治)를 시행하였기 때문에 이것이 뒤에 화근이 되었다. 그는 내란으로 동요된 외정(外政)을 바로잡기 위해 몽골 ·만주를 여러 차례 공략하여 헤이룽강[黑龍江]까지 위세를 떨쳤고, 구이저우[貴州]를 내지화(內地化)하였으며, 티베트 ·윈난을 정복하고 안남(安南:越南)을 병합하였으나, 큰 업적은 남해의 원정이었다. 1405∼24년 사이 정화(鄭和) ·왕경홍(王景弘)에게 선박 60척, 선원 3만을 주어 전후 6회에 걸쳐 인도양안(印度洋岸)에서 아프리카 동안(東岸)까지의 여러 나라에 파견하여 국위(國威) 선양과 무역진흥에 힘써 30개국에서 입공(入貢)하고 한인(漢人)들에게 해외를 보는 눈을 뜨게 하였다.
명나라의 기반은 이 2대 사이에 확립되어 15세기 중반 이후는 내정(內政)에 힘을 기울여 왕들의 세력 감축에 성공하였으나 외정에서는 수세(守勢)에 몰렸다. 1449년 몽골의 한 부족인 오이라트부(部)의 남침으로 친정(親征)에 나선 영종(英宗)이 포로가 되고(土木의 變), 수도도 포위되어 명신(名臣) 우겸(于謙)의 책략으로 멸망의 위기는 벗어났으나, 이후 장성(長城)을 수축하고 9변진(邊鎭)을 설치하여 다수의 병력을 배치하는 등 방위에 힘을 기울였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네이버 백과사전
엠파스 지식검색
「한권으로 정리한 이야기 중국사」- 조관희, 청아출판사
「노예, 전쟁, 혁명, 미술, 사상으로 읽는 세계사」- 고지기, 청년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