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usiness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종대왕의 국가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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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business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종대왕의 국가경영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세종대왕의 시대와 요즘시대의 새로운 개념인 E-business 는 어떻게 보면 서로 맞지 않다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과의 특징은 기존의 경영방식에 인터넷을 결합한 학문이기 때문에 세종대왕의 경영의 틀에서는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다 생각합니다.
막연히 저희 학부의 관점에서만 세종대왕을 바라보려고 하니 처음에는 많이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E-biz의 개념에는 ‘기존의 방식을 향상, 발전시키는 경영원리’ 와 ‘커뮤니케이션’ 즉, 의사소통과 ‘새로운 아이디어’, 사람들과의 관계 등 이러한 것들이 있으며 따라서 그에 맞는 지식적인 경영과 정보에 관해서 배우게 됩니다.
먼저 세종대왕하면 훈민정음 창제와 측우기, 해시계 등의 많은 발명품을 남긴 것과 이미 널리 알려진 그의 훌륭한 업적 등이 떠오르는데 그가 어떻게 그 많은 위업을 이룰 수가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과연 세종대왕이 조선의 요순시대를 이룬 임금이라 칭송을 받고, 후손에게 길이 추앙받을 대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란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세종대왕이 어떤 식견을 가지고 어떻게 조직에 생기를 불어넣었으며, 무슨 고민을 했고 어떤 노력들을 기울였는가를 알아봄으로써, 앞서 말한 E-biz의 개념으로 그 시대의 세종대왕의 국가경영을 조명해 볼까 합니다.
뛰어난 인재경영
세종은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과 관계, 즉 사람과 인재의 경영에 있어서 정말 뛰어난 인물 이였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굉장히 뛰어난 실력의 CEO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혀주는 인재가 없이 절대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인재를 발굴하여 그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며 사람의 마음을 필요에 따라 적절히 움직일 수 있는 세종의 인재의 경영은 정말 뛰어났다 볼 수 있습니다.
요즘은 실력이 중시되는 시대이긴 하나 아직 한국에는 인맥과 학연이 크게 존재하는 사회입니다. 하지만 세종은 과감히 실력위주와 신분의 높낮이를 완전히 철폐하여 사람을 뽑았는데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성삼문과, 장영실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성삼문은 이름 없는 가난한 선비 밑에서 자란 학자로써 신분에서 크게 낮았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그를 중용하였는데
그 이유 중 좋은 예가,
당시 세종이 과거에 합격한 세 사람을 만나고 있을 때 그들의 집안 내력과 학문의 깊이에 관해서 물어보고 있었습니다. 그다음 성삼문에게 자기소개를 해보라 하자
"전하께서 성덕이 높으시다는 소문을 멀리서나마 듣고 늘 흠모해 왔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앞으로 전하의 시대를 열어 가야 하는데, 인물의 됨됨이를 보지 않으시고, 그가 어떤 명문가의 자제인지, 또 그의 아비가 누구인지, 어떤 배경인지에 대해서만 물으시니 오늘 적잖게 실망했습니다. 소생은 지리산 촌동네의 이름 없는 쇠락한 선비 가문의 자식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앞날을 위해 죽도록 일할 준비가 누구보다도 단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정말 당돌한 답변 이였지만 세종은 문제를 삼지 않고
"바른 말이고 옳은 얘기다. 앞으로 과인에게 직언으로 대하고 나를 많이 도와 달라." 라며
세종이 임금으로서 신하에 대해 예우를 갖추자 성삼문은 크게 절하며, 성은이 망극하다고 했다. 말년에 삼문은 임금에게, 당시 마음속으로 이러한 군왕이라면 죽음을 각오하고 충성하겠노라 결심하였다 한다. 그 이후로 세종 옆에서 열심히 학문은 펼쳤던 성삼문은 지금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학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리고 장영실은 신분에서 가장 큰 제약을 받았던 사람인데, 어머니가 기생출신인 관노로써 원래는 절대 등용될 수 없는 가문 이였습니다. 하지만 뛰어난 손재주 등으로 많은 소문이 돌자 그를 직접 본 세종은 그의 천재성에 감복하여 그를 등용하려 하였으나 그 과정에서도 고리타분한 신분론에 대해 일일이 반박해 신하들을 설복시켰고, 훈민정음을 반포할 때도 신하들의 반대 상소를 일일이 다 읽어가면서 논박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어렸을 때부터 풍부한 독서량을 자랑했다. 왕의 신분에서 동서고금의 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기에 당시 세종의 학식을 따를만한 신하가 없었던 것이다. 참고로 태종은 즉위 기간 동안 총 학술 경연이 4회였던 데 반해, 세종은 총 1800회 정도였다고 한다. 사람에 대해 편견을 갖지 않았던 세종은 작은 재능이라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 등 그 사람의 장점을 취하여 포용하면서도, 엄격한 기준으로 혹독하게 신하를 훈련시킨 강유(强柔)를 겸비한 임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