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국가경영 컴퓨터학부 과학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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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종대왕의 국가경영 컴퓨터학부 과학기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세종. 조선의 제 4대 임금으로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 있는 두 명의 대왕으로 불리는 통치자중 한명이다. 세종이 대왕으로 불리는 이유의 가장 큰 것은 아무래도 지금 대한민국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한글을 만든 것이다. 훈민정음이라는, 세계 최초로 누군가의 의지로 만들어진, 지금도 전 세계의 학자들이 최고의 언어로 뽑는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종대왕의 재위기간 동안 훈민정음만큼이나 뛰어난 업적들이 있다. 음악 분야의 발전부터 시작해서 과학 분야의 발전, 그리고 국토확장까지 매우 많은 분야에 걸쳐져 있다. 하지만 훈민정음을 제외한 대부분의 것은 훈민정음이라는 큰 빛 아래에 묻혀 무엇이 있으며 누가 그 도움을 주었으며 어떻게 발전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기에 이번에 세종대왕 시절의 훈민정음이 아닌 다른 것, 그 중에서도 과학기술 분야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본론 1)세종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정책
그 옛날 인간이 존재했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과학기술이라는 것은 곧 국력으로 표현되어 왔다. 과학 기술이 뛰어난 나라, 또는 민족이 그 시대에 있어 큰 힘을 가지고 그 힘을 통해서 상대방을 정복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일들이 역사서에 많이 등장한다. 즉, 예나 지금이나 과학기술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세종대왕도 과학기술의 필요성을 많이 느꼈을 것이고 그렇다면 분명히 과학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정책을 사용했을 것이다. 본 수업의 교재를 참고하자면 세종시대는 한국과학사상 뿐만 아니라 15세기 전반의 세계 과학기술사에서 “서방세계는 물론, 아랍세계와 중국의 과학기술 수준을 능가하는 것” (전상운1992, 142)으로 평가받고 있다. 천문학의 발전과 당대 최상급의 금속활자 및 정밀한 기계시계의 제작, 그리고 세계 최초의 우량계의 발명 등이 그 근거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눈부신 성과가 가능했던 배경으로서 국왕 세종의 인재발탁과 이천-장영실 등의 팀웍 형성의 리더십이다. 팀웍을 형성하는 그의 리더십이다. 예컨대 정교한 금속활자인 갑인자(甲寅字) 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이천은 다른 과업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그 일을 감독[監]’ 하되 장영실이순지 등으로 하여금 ‘일을 주장하여 맡도록[掌]’ 했다. 팀 구성원들이 좋은 아이디어를 내고, 그 일을 “오로지 주장하게[專掌]” 하여 성과를 거두도록 한 것이 좋은 결실을 가져온 것이다.(세종의 국가경영, 국민대학교, 김영수교수) 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세종의 재위 시절에는 과학기술도 전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연 세종의 업적 중에 과학 기술의 발전이라는 것이 추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세종 065 16/07/01(병자) / 새로 만든 누기의 구조와 원리 및 보관 장소와 누기 명의 내용 이날부터 비로소 새 물시계를 썼다. 임금이 예전 누기가 정밀하지 못한 까닭으로 누기를 고쳐 만들기를 명하였다. 파수용호는 넷인데, 크고 작은 차이가 있고, 수수용호는 둘인데, 물을 바꿀 때에 갈아 쓴다. (생략)간의와 참고하면 털끝만치도 틀리지 아니한다. ①임금이 또 시간을 알리는 자가 차착됨을 면치 못할까 염려하여, 호군 장영실에게 명하여 사신 목인을 만들어 시간에 따라 스스로 알리게 하고,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아니하도록 하였으니, 그 제도는 아래와 같다.① (생략)김빈에게 명하여 명과 아울러 서를 짓게 하니, 그 글에 이르기를, “제왕의 정치는 때를 조화하게 하고, 날을 바르게 하는 것보다 중함이 없고, 상고해 실험하는 법칙은 의상과 귀루에 있으니 대저 의상이 아니면 천지의 운행을 살필 수 없고, 귀루가 아니면 밤낮의 한계를 표준할 수 없다. 천년의 긴 세월은 일각의 틀리지 아니함에서 비롯하고, 모든 공적의 빛남은 촌음을 헛되게 하지 아니하는 데에 말미암는 까닭으로, 역대의 성신들이 하늘에 순응하여 나와서 다스리되, 여기에 삼가지 않음이 없었다.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요임금의 하늘을 공경하는 마음을 두시고, 대순의 선기옥형을 만드는 뜻을 몸받으시어, 이에 유사에게 명하여 의상을 제작하여 측후의 근거를 삼고, 인해 누기를 새로 만들어 시각을 바르게 하여, (생략) 의상을 참고 연구하매 하늘과 어긋나지 아니하여, 참으로 귀신이 있어 지키는 것 같았으니, 보는 자가 놀라고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실로 우리 동방의 전고에 없는 거룩한 제도이다. 드디어 그 집을 보루각이라 이름하고, (후략) (세종의 국가경영, 국민대학교, 김영수교수). 이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 몇 가지 있다. 우선은 세종이 과학기술 발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시간을 알리는 기계가 확실하지 않자 호군 장영실에게 명하여 그 기계를 만들라고 한 것과 사신 목인을 만들어 궁내에 둔 것을 본다면 이는 과학 기술의 개발을 크게 상관하지 않던 다른 왕들과는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것은 그 과학 기술의 발전을 백성을 위해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①~①사이에 보면 세종은 시간을 알리는 자가 차착[순서가 틀리고 앞뒤가 서로 맞지 않음]될 것을 염려하여 시간에 따라 스스로 알리는 장치를 만들라고 명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냥 넘어갈 부분을 세심히 생각하여 만에 하나 시간을 알리는 자가 작은 실수를 하여 큰 벌을 받게 될 것을 염려한 것이다. 이는 세종의 성품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료가 된다.
또 다른 자료를 찾아보면.. 세종 061 15/09/16(을미) / 안숭선에게 명하여 장영실에게 호군의 관직을 더해 줄 것을 의논하게 하다. 안숭선에게 명하여 영의정 황희와 좌의정 맹사성에게 의논하기를, ”행 사직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대 원나라의 소항주 사람이었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임인계묘년 무렵에 상의원 별좌를 시키고자 하여 이조 판서 허조와 병조 판서 조말생에게 의논하였더니,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고 하고, 말생은 ‘이런 무리는 상의원에 더욱 적합하다.’고 하여, 두 의논이 일치되지 아니하므로, 내가 굳이 하지 못하였다가 그 뒤에 다시 대신들에게 의논한즉, 유정현등이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고 하기에, 내가 그대로 따라서 별좌에 임명하였었다. 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에 뛰어나서, 매양 강무할 때에는 나의 곁에 가까이 모시어서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찌 이것을 공이라고 하겠는가. ②이제 자격궁루(=물시계)를 만들었는데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마는,② 만약 이 사람이 아니더라면 암만해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들으니 원나라 순제 때에 저절로 치는 물시계가 있었다 하나, 그러나 만듦새의 정교함이 아마도 영실의 정밀함에는 미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만대에 이어전할 기물을 능히 만들었으니 그 공이 작지 아니하므로 호군의 관직을 더해주고자 한다.“ 하니, 희 등이 아뢰기를, ”김인은 평양의 관노였사오나 날래고 용맹함이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호군을 특별히 제수하시었고, 그것만이 특례가 아니오라, 이 같은 무리들로 호군 이상의 관직을 받는 자가 매우 많사온데, 유독 영실에게만 어찌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세종의 국가경영, 국민대학교, 김영수교수) 이 자료는 더욱 많은 것을 알려준다. 첫 번째로 세종의 인재 활용을 알 수 있다. 호군 장영실은 그 어미가 기생으로 태생이 천한 사람이었으나 그 능력을 탁월하기에 세종은 그러한 태생은 생각지 않고 장영실을 뽑아서 사용했다. 이는 이 시절에는 생각하기 어려운 태생이 천하여도 능력이 뛰어나면 그는 능히 사용할만하다 는 것을 직접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처음에는 주위의 신하들이 말리는 것도 적지 않았을 것이고, 특히 호군이라는 정사품의 관직을 주는 것을 보면 세종의 생각은 상당히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전쟁에서 뛰어난 공을 세운 이에게 포상과 관직을 내리는 것과 같이 과학 기술에 있어 뛰어난 공을 세운 사람에게 높은 관직을 내리는 것은 일종의 포상으로 할 수 있다. 뛰어난 지도자는 벌을 줄 때에는 벌을 주고 상을 줄 때에는 상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세종이 몸소 실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로 ②~②부분을 보면 세종 자신이 장영실에게 물시계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세종이 과학 기술에 대한 일정 이상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이는 세종이 평소에도 과학에 관심이 많아 공부를 미리 했고, 관련 서적을 많이 읽었음을 가르쳐준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은 장영실이라는 과학자가 세종시대에 존재했었고 그의 머리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고안에서 시작되어 발명된 것이라고 생각되어진 것들이 실제로는 세종에게서 나온 것이 많다는 것이다.
본론 2) 세종 시대에 발명된 발명품들
(여기에 실린 사진은 영릉[세종대왕의 묘]에 있는 사진임을 미리 밝혀둔다.)
결론 : 세종의 국가 경영의 입장에서 본 과학기술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본 결과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선 세종대왕은 과학이라는 분야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인재를 쓸 줄 알았다는 것. 이러한 것들이 세종 시대에 수많은 발명품을 내놓을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 아닐까? 또한 본문2의 자료를 보면 천문 관측 기기와 강수량, 하천의 높이를 재는 기기가 대부분이다. 이 때에는 농경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정확한 천문관측이 이루어지는 것이 농업의 발달로 이어지고 그것이 농업 생산량을 증가 시키고 결국 백성들이 굶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기에 세종 시대에는 뛰어난 과학 기술로 백성들의 생활이 비교적 편안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