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역사 공과의 원칙은 구체제의 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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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의의 역사 공과의 원칙은 구체제의 관행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9세기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상가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정의의 이상적인 기준을 만들어 사회제도에 대한 평가의 기준으로 삼겠다는 목표를 가지게 된다. 여기서 정의의 이상적인 기준은 사회의 혜택과 부담의 분배되는 방식에 초점을 두고 있다. 19세기 이전에도 이와 같은 시각으로 본 학자들이 많았는데 플라톤의 폴리스를 정교하게 그린 『공화국』이나, 이상적인 공산주의를 묘사한 『유토피아』가 그것이다. 또 홉스는 정치 질서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였지만 거의 정치적 영역에만 국한되는 한계를 갖는다. 이 사상가들 중 ,19세기에 많은 사상가들의 귀감이 된 사상가는 벤담이다. 벤담은 제도와 관행에 대한 사고의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 내었고, 열렬한 개혁가였다. 19세기 이전 홉스부터 벤담까지 사회적 세계를 인간 관습의 산물로 보았다. 하지만 정의의 기준으로 정치제도와 사회를 밑바닥으로부터 다시 만들어 내는 것을 불가능 하게 보고 있다는 한계를 갖는다. 이와 같은 한계는 19세기에 점점 개선되어 지는데, 19세기에도 역시 사회적 세계는 인간 행위의 산물이며 노력에 따라 개혁되고 대체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또 이전과 달리 정치제도와 사회를 밑바닥부터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생각이 가능 할 수 있었던 것은 18세기와 19세기의 기술혁신 그리고 프랑스 혁명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기술혁신은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지적토대를,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의 정치와 사회를 완전히 다시 구충하려는 대 사건으로 비치며 새로운 감수성으로 이동하게 된다.
생시몽이 이러한 감수성을 잘 담아내고 있는데, 이 글에서 뒤엎다, 창조하다, 해체되다, 재구성 하다 등과 같은 단어는 극적인 사회변혁이 가능하며, 더 나아가 구질서의 붕괴 때문이 불가피 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생시몽에 이어 이러한 감수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은 마르크스 이다. 마르크스는 인류의 그동안의 역사는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채 전개되어 왔으며, 그 결과로 사회적 협력의 중요한 형태들은 매우 필연적이고 연속적으로 띠게 될 수 없으며, 이는 인간들의 의식적인 계획의 결과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예를들어, 분업의 경우도 의식적이고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체제가 아니며, 오히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편협한 이유가 사회의 생산력을 크게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는 다른 모든 의미 있는 제도들의 특징은 생산 활동과 생산력 조직방식의 영향을 받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 당시 시대가 인간의 역사의 방향을 바꿀 분기점에 서 있다고 믿으며, 이에 대해 대중들이 이해한다면 역사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며,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의 집단의지에 의해 의식적이고 신중히 조종되는 역사가 시작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의 저서 「자본론」에는 그 전 시대의 경제들은 인간의 의도나 의지와 관계없이 그 경제의 방향과 목적지를 결정하는 법들의 지배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 마르크스가 앵갤스와 공동집필한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에서는 인간이 존재해 온 기간에 대한 구분법을 두 단계로 제시한다. 첫 번째는 자연적 사회로 남아있는 단계로ㅆ, 인간의 행위는 자발적이지 않고 자연적으로 분리 되어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이질적인 힘으로 변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들이 그 힘의 기원과 목표에 대해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 힘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이와 반대되는 단계가 있는데, 이 단계에서 인간의 행위는 자연적이지 않고 자발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자신의 행동에 지배당하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이다. 노동의 분화와 방향은 인간의 통합된 의지를 따르게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주장은 여러 사상가들에게 받아들여졌는데, 그 중 한명이 존 스튜어트 밀이다.
밀은 사회적 관계는 자연적 관계와 같지 않다고 주장하는데 밀과 같은 주장을 이어 공리주의의 리더의 역할을 헨리 시지윅에게 넘긴다. 이에 대한 헨리 시지윅은 정의와 자연성의 관계에 대해 한참을 고민한 후, 이러한 물음을 던진다. 인간들의 권리와 특권, 부탐과 고통을 더할 나위 없이 정의롭게 분배할 수 있는 기준이 되어줄 명쾌한 원칙은 과연 없는 것인가 말이다. 여기서 정의롭게 분배할 수 있는 기준이 되어줄 명쾌한 해답은 앞에서 언급했던 사회 정의를 세우는 것과 같은 뜻으로 이러한 기준으로 사회제도들을 평가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애덤스미스와 칸트에서도 발견되어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시지윅의 물음에 대해 철학자들과 비판가들은 두 가지 대답을 내 놓는데 , 그 중 하나는 생시몽의 많은 글에 담겨있다. 그는 공과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가설적인 시나리오를 내 놓는다. 그중 하나는 왕과 귀족들, 교회 지도자, 고위 관리, 정보의 각료등 지도자급 인사 3만명을 잃게 된다. 그렇게 되면 프랑스는 엄청난 손실을 입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잃는다고 프랑스는 정치적 손해를 입지 않고 단지 유명인 상실에 따른 감정적 슬픔이 동반 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와 반대로 과학자, 예술가, 시인과 화가 그리고 농민등 3천명의 시민을 잃을 경우 다른 시나리오를 내놓는다. 이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생산자들이며, 동료시민들에게 가장 유용한 사람들이며, 프랑스 문명과 번영에 가장 많이 생산을 기여하난 사람들이라고 생시몽은 주장한다. 이와 같은 시나리오로 생시몽은 시민들을 두 종류로 나누는데, 전자의 시민은 존재자체가 다른 사람들의 노력과 기여에 기생하고 있으며, 단순히 효용만 없는 게 아니라 국가에 해롭기까지 하다. 후자의 시민들은 국가의 명성과 동료들의 행복에 기여하는 시민인 것이다. 만약, 전자가 더 탁월하고 부자이며 후자가 빈자가 되어 있는 모습은 거꾸로 뒤엎어져야할 사회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빈자는 기여도에 걸맞은 보상을 받지 못하는 사람을 뜻하며 생시몽의 사상이 공과의 원리에 따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공과의 원리란 사람들은 사회에 대한 기여를 근거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생시몽과 같은 사회주의자와 기술주의자 들은 공과의 원리를 통해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때,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유시장의 원칙들과 결별을 해야 한다고 본다.
더 나아가 스펜서는 정의에 대해 두 가지 요소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평등적 요소로서, 정해진 한계 안에서 행동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뜻한다. 다른 하나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본성과 그에 따른 행동 때문에 이득도 챙기고 해도 입는다는 견해로 구성원들에게 돌아가는 좋거나 나쁜 결과는 가치로 따져서 그 사람이 야기한 좋거나 나쁜 결과와 동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스펜서가 말하는 균형 잡힌 상호적 결과가 가장 잘 성취되는 사회는 구성원 각자가 다른 사람들과의 거래에 개입하거나 거부할 자유를 폭넓게 누리는 사회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인식들의 핵심에 있는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관계는 규칙과 관습의 구속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의 의지의 산물이여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회관계는 관습과 규칙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 관습은 대대로 이어져 왔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스펜서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는 과거의 강력한 현상들을 깨고 급격히 변한다고 생각하였다. 더 이상 사회관계의 근거가 신분이 아닌 계약으로 이동되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공과의 원리는 사회주의 원칙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며, 자유주의 원칙으로도 이해 할 수 있다. 사회주의 원칙으로 이해할 경우엔 유능하고 편견없는 대표자가 집단에 의해 정의된 공과의 개념에 따라 보상을 나눌 때 그 원칙이 실현된다. 자유주의 원칙에 따른다면 개인들이 가능한 한 자유롭게 타인들과 거래를 하며 타인들이 주려는 것을 보상으로 챙길 수 있을 때, 그 원칙이 실현된다.
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해석하든지 공과의 원칙은 구체제의 관행으로부터 급격히 이탈하는 것을 말하는게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