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양혜왕 다섯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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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맹자 양혜왕 다섯 번째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齊宣王問曰, 齊桓, 晉文之事可得聞乎. 齊宣王, 姓田氏, 名彊, 諸侯僭稱王也. 齊桓公 晉文公, 皆諸侯者.
제 선왕(齊宣王)이 묻기를, “제 환공(齊桓公) 『史記』卷32「齊太公世家」第2 “桓公得管仲,與鮑叔、朋、高修齊國政,連五家之兵,設輕重魚鹽之利,以贍貧窮,祿賢能,齊人皆說. … 七年,諸侯會桓公於甄,而桓公於是始焉. … 三十五年夏,會諸侯于葵丘. 周襄王使宰孔賜桓公文武、弓矢、大路, 命無拜. 桓公欲許之,管仲曰, 不可.乃下拜受賜.” [환공이 관중管仲과 포숙鮑叔, 습붕朋, 고혜高를 얻어 제나라 정치를 닦고 다섯 가구를 병사로 연결하고 어염魚鹽을 물가 조절하여 이익을 세웠으며 빈궁한 자들을 넉넉하게 해주고 현명하고 재능 있는 자에게 봉록을 주니 제나라 사람들이 모두 기뻐했다. … 7년, 제후들이 견甄에서 환공과 회맹하니 환공은 이에 처음으로 패자가 되었다. … 35년, 여름. 제후들과 규구葵丘에서 회맹했다. 주 양왕周襄王이 재宰 공사孔賜로 하여금 환공에게 문왕과 무왕께 올린 제육과 동궁시弓矢, 대로大路(大輅 : 어가)를 주면서 절을 하지 말게 했는데 환공이 이를 허락하려 했지만 관중은 불가하다고 말했다. 이에 내려가 엎드려 절하고 하사품을 받았다.]
, 진 문공(晉文公) 『史記』卷39「晉世家」第9 “文公修政,施惠百姓. 賞從亡者及功臣,大者封邑,小者尊爵. … 天子使王子虎命晉侯伯,賜大輅,弓矢百,弓矢千,一,珪瓚,虎賁三百人. 晉侯三辭,然后稽首受之. … 於是, 晉文公 稱伯.” [문공이 정치를 닦아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자신을 따르다) 죽은 자 및 공신에게 상을 주었는데 공이 큰 자는 봉읍을 주고 작은 자는 작위를 높였다. … 천자가 왕자 호虎로 하여금 명을 내려 진후晉侯를 백伯으로 삼고 대로大輅 , 동궁시弓矢 1백 개, 노궁시弓矢 1천 개, 거창( : 향이 좋은 술) 1 독, 규찬珪瓚, 호분虎賁 3백 명, 진후는 세 번 사양한 후 머리를 조아리고 받았다. … 이에 진 문공은 패자라 칭했다.]
의 일을 들을 수 있습니까.” 제 선왕은 성이 전(田)씨 제나라는 본래 강씨(姜氏)의 나라로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한 뒤 무왕(武王)이 태공망(太公望 : 姜尙 또는 呂尙)을 제후로 봉한 것이 그 시초이다. 춘추시대에 16대 제 환공에 이르러 관중(管仲)의 중상주의 경제정책과 부국강병책을 채택하여 가장 먼저 패업을 이루었다. 제 환공 시절 진(陳)나라 진 여공(陳公)의 아들 진완(陳完, 시호는 敬仲)이 제나라로 망명해 성을 전씨(田氏)로 바꾸었으니 이것이 제나라 전씨의 시초이다. 제나라는 제 환공과 관중이 죽은 후 세력이 위축되었다가 제 경공(齊景公)이 즉위하고 안영(晏 : 晏子)이 이를 보좌하여 잠시 중흥기가 찾아왔다. 그러나 제 경공 사후 제나라에 뿌리를 내린 진완의 후예들, 즉 전씨가 득세하여 마침내 B. C. 386년 전씨의 대표자이자 재상이었던 전화(田和)가 제 강공(齊康公)을 내쫓고 주나라에 의해 제후에 봉해졌다. 전화는 자신을 태공(太公)이라 했고 마침내 제나라는 전씨의 나라가 되었다. 따라서 편의상 태공망을 시초로 한 제나라를 강제(姜齊)라 하고 전화가 세운 나라를 전제(田齊)라 부르기도 한다.『史記』에서는 이를 구별하기 위해 강제를「齊太公世家」, 전제를 「田敬仲完世家」로 따로 기록했다.
이고 이름은 벽강(彊)이며 제후로 왕이라 참칭했다. 『史記』卷46「田敬仲完世家」第16 “三十六年,威王卒,子宣王彊立.” [제 위왕齊威王 36년(B. C. 342) 위왕이 졸하고 아들 선왕宣王 벽강彊이 즉위했다.]
제 환공, 진 문공은 모두 패업을 이룬 제후이다.
孟子對曰, 仲尼之徒無道桓文之事者, 是以後世無傳焉. 臣未之聞也. 無以 無以의 ‘以’가 ‘已’와 의미가 통하므로 無以는 ‘不得已’로 해석한다(우재호 역, 『맹자』, 을유문화사, 2007, p80).
, 則王乎. “無以則王乎” 구절 번역에 대해 기존에는 대부분 “부득이 하다면 왕도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王乎’를 “왕이겠습니까.”로 해석하고 ‘無以’를 제 환공, 진 문공의 패업이 세상에 전하지 않아 들리는 바가 없다는 것을 ‘無所聞’으로 해석하고 앞에 ‘齊桓晉文’이라는 주어가 생략된 것으로 보아 최종적으로 “들리는 바가 없다면 왕이겠습니까.”로 접근하였다(韓學重,『孟子』“無以則王乎” 新解, 中國學論叢, 2004, p17~23).
道, 言也. 董子 동중서(董仲舒 : B. C. 179? ~ B. C. 104?)를 가리킨다. 중국 전한(前漢) 때의 유학자로 신도(信都) 광천(廣川) 사람이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배웠다. 한 경제(漢景帝) 때 박사에 임명되었으며 한 무제(漢武帝)가 즉위하자 현량대책(賢良對策)으로 백가(百家)를 몰아내고 유술(儒術)만을 존중할 것을 주장했는데, 무제가 받아들여 이후 2천 년 동안 유학(儒學)이 정통 학술로 자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하늘과 인간이 감응하는 현상은 고금의 변치 않는 도리”라고 말하며 유가의 천인합일(天人合一), 천인감응(天人感應) 설 등을 주장했다.(『漢書』卷56「列傳」‘董仲舒’ 第26)
曰, 仲尼之門, 五尺童子羞稱五. 爲其先詐力而後仁義也, 亦此意也. 以 已通用. 無已, 必欲言之而不止也. 王, 謂王天下之道.
맹자가 답하기를, “공자의 제자들은 환공과 문공의 일을 말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후세에 전해지는 게 없습니다. 신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제 환공, 진 문공이) 없으니 (無以) 즉 왕이라 하겠습니까.(則王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