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의성군 세종의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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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 의성군 세종의 건강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지금의 우리나라를 있게 한 위대한 위인중의 한분이자 정말 많은 한국인들이 존경하는 세종대왕. 한글 창제와 음악 장려, 과학 중흥, 국방 강화 등의 엄청난 일들을 하시며, 30여년의 재위기간동안 정말 치세를 하신 세종대왕. 정말 많은 일들을 하시기에 평소 지병도 많으셨다고 들었다. 거기다가 최근에는 성병에 걸려 돌아가셨다는 이야기까지 듣게 되어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 적이 있었다. 정비 외에도 많은 후궁들 사이에서 18남 4녀라는 자녀들을 낳은 세종대왕이라는 생각이 드니 정말 성병으로 돌아가셨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세종대왕의 죽음에 대해 알아보기로 결심하였다.
22세에 왕위에 오른 세종은 54세에 하직했으니 33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이 재위 기간동안 늘 격무에 시달리던 세종은 40대에 들어서면서 급속히 건강이 나빠졌다. 그래서 세종은 이미 장성한 왕세자에게 결재권을 넘겨주고 자신은 일상 업무에서 물러나기를 희망했다. 마흔 살이 되던 1436년에 왕세자의 섭정 문제를 꺼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양보했던 세종은 결국 1442년에 가서야 뜻을 이룬다. 여기서 그 당시(세종 21년-1439년) 세종이 자신의 건강 상태를 직접 말하는 부분을 살펴보자.

즉위 21년 후에 들어 자신의 건강상태를 파악하고, 말년에 가서야 치료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 원인은 즉위 초부터 예견되고 있었다. 세종은 체구가 비중했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혈류순환 장애는 물론 혈탁이 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혈탁은 피가 탁해지는 것을 한방적으로 지칭하는 것인데, 심하면 염증성 질환이 쉽게 온다. 또 혈액의 농도가 높아져 수분 대사가 잘 안돼 부종, 설사도 생기기 쉽다. 역시나 실록에서는 세종이 안질, 종기, 부종, 설사 등의 질병을 앓았다는 기록이 자주 눈에 띈다. 혈탁의 원인은 영양과잉, 대사의 이상, 노폐물 배출 장애에 있다. 혈탁을 막기 위해서는 소식을 하며 대소변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규칙적이고 꾸준한 운동이 필요하다. 태종은 이를 잘 알았던 듯 경기도 관찰사로 하여금 세종에게 운동을 시키라 명하기도 했다. 세종은 30세 전후로 소갈(당뇨)을 얻었다. 말년까지 고통스럽게 한 안질(눈병)은 그 원인이 혈탁 뿐 아니라 당뇨의 합병증으로도 추측된다.
이와 같은 많은 병의 원인은 세종이 재위 기간 내내 시달려오던 격무와 지나친 백성 사랑때문이었다.
세종의 즉위 초, 심한 탈수증에 걸렸다. 아무리 물을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으므로 어의를 불러 진맥을 받았다. 진맥을 끝낸 후 어의는 왕의 음식을 맡아서 장만하는 사선관한테 흰 수탉과 노란 암탉과 양고기를 한데 고아서 오랫동안 드시게 하면 나을 것 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사선관이 그날로 닭고기와 양고기를 고아 왕의 수라상에 올렸다. 세종이 상을 받고 보니 전에 없던 음식이 놓여 있으므로, 사선관을 불러 물었다. 사선관이 의관의 말을 옮기자, 세종은 부드러운 말로 책망했다. “이제부터는 이런 값진 음식은 올리지 말도록 하여라. 과인이 평소에 의복과 음식을 검소히 하는 것은 물건을 아끼자는 마음에서인데 이 무슨 사치스러운 음식이냐. 하물며 양은 우리나라에서 생산하는 짐승도 아니요, 멀리 외국에서 가져오는 동물이 아닌가. 내가 이런 음식으로 병을 고치자면 수백 마리의 닭과 양을 잡아먹어야 할 것이니, 그것이 백성들에게 얼마나 부담을 주는 일이 되겠느냐.” 사선관은 어전에 엎드려 아뢰기를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옵니다만, 우리 조선이 아무리 작은 나라라고 할지라도 존엄하신 전하 한 분의 환을 다스리기 위해 그 정도의 짐승을 잡는 것을 어찌 마다하겠으며, 그것이 백성들에게 무슨 큰 폐가 되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양은 외국에서 들여오는 것이 아니라, 요즈음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기르고 있어서 조달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니 분부 거두시고 부디 이 약식을 오래 잡수셔서 옥체를 보전하십시오.”
“무슨 소리냐. 아무리 미물일지언정 짐승을 함부로 죽여서도 안되거니와, 백성들에게 조금이라도 민폐를 끼치는 것 역시 과인으로서는 못할 노릇이다. 그러니 더 이상 아무 소리 말라.” 사선관을 꾸짖은 세종은 끝내 그 음식을 들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병 치료보다 백성에게 끼칠 민폐를 줄이고자 함이었다. 이것 말고도 하나의 일화가 더 있다. 역시 즉위 초에 생긴 일이다. 세종은 경복궁 후원에 있는 경회루 동쪽에 초가집 한 채를 지으라고 지시했다. 이윽고 초라한 초가집이 완성되자, 때때로 그곳에 거동하여 몸소 들어가 지내곤 하는 것이었다. 그 모양을 본 중신들과 궁인들은 해괴하고 민망해서 그냥 넘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 행동을 중지하도록 간청하자, 세종이 말했다. “과인은 한 나라의 왕자로 궁중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백성들이 초라한 오두막 초가 살이를 하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불편한지를 알 수가 없다. 나라를 다스리는 몸으로서 백성들의 고초와 불편을 몰라서야 어찌 참된 군왕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들을 조금이라도 체험함으로써 이해하고 이 초막을 짓고 그들과 똑같은 생활을 해보려는 것이다.” 백성을 생각하는 정성이 그처럼 지극했으니, 본인의 말 그대로 구중궁궐에서 태어나 어려움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라난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타고났다고 할 수밖에 없는 어진 마음이다.
이렇게 즉위 초부터 말년까지 오직 백성의 안위만을 살피던 세종. 격무는 격무대로 시달렸지만 자신의 몸 챙기는데 소홀히 해서 많은 병을 얻게 된 것이다. 위에서 말 했듯이 세종은 즉위 20여년이 지난 뒤에야 자신의 몸을 돌보기 시작했다. 왕세자(후의 문종)의 섭정을 결심한 뒤에서부터였다. 세종 23년 실록에는 임금의 병이 온천욕으로 차도가 있다는 내용이 있다. 세종은 안질, 부종 등을 치료하기 위해 부지런히 온천을 즐겼다. 온천은 심폐활동을 강화하여 말초 혈행을 개선시키고 소변량과 땀의 배출을 증가시킴으로써 노폐물의 배출을 용이하게 한다. 임질로 인한 통증 때문에 말도 제대로 못 탔을 정도였다고 한다. 임질 치료를 위해 죽엽석고탕 등 탕제를 하루에 3번쯤 드셨다는 기록도 있다. 그래서 성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설도 있지만, 그보다는 오랫동안 앓아오던 당뇨의 합병증으로 돌아가셨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의 지병들에 대해 알아보다 보니, 정말 그의 백성을 위하는 마음에 감동을 받게 되었다. 세종은 문종에게 많은 업무를 넘긴 다음에도 백성을 위한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 것의 단적인 예가 1443년 창제하고 1446년 반포한 훈민정음이다. 즉위 전부터 죽기 직전까지 오직 나라와 백성들의 안위만 걱정했던 세종대왕. 조선 건국 초, 나라의 기틀을 잡는데 세종이 없었다면 그것이 몇 년이나 더 걸렸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일 것이다. 자신의 건강을 돌볼 시간과 재물까지도 모두 백성들에게 투자했던 세종대왕을 다시금 우러러보게 만든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참고문헌
손영묵 오늘(1997년)
노회찬 일빛(2004년)
평양사회과학원민족고전연구소 여강출판사(199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