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업적으로 살펴본 세종대왕의 정치적 이념

 1  세종대왕의 업적으로 살펴본 세종대왕의 정치적 이념-1
 2  세종대왕의 업적으로 살펴본 세종대왕의 정치적 이념-2
 3  세종대왕의 업적으로 살펴본 세종대왕의 정치적 이념-3
 4  세종대왕의 업적으로 살펴본 세종대왕의 정치적 이념-4
 5  세종대왕의 업적으로 살펴본 세종대왕의 정치적 이념-5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세종대왕의 업적으로 살펴본 세종대왕의 정치적 이념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세종대왕 조선 제4대 왕 태종과 청천부원군 심온의 딸 원경왕후 민씨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1408년 충녕군에 오르고, 1413년에 대군이 되고 1418년에 왕세자에 책봉, 동년 8월에 22세 나이로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유교 정치의 기틀을 굳건히 하고, 한글 창제를 비롯하여 조선 시대 문화의 융성에 이바지하고 과학 기술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세종대왕은 정치, 경제 ,문화면에 뛰어난 업적을 쌓아 높은 수준의 문화를 널리 전파하고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다져 현대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역사적 위인으로 전해지고 있다. 세종 즉위기간 동안의 그의 업적은 이미 누구나가 다 알고 있을 만한 것들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세종대왕이 이뤄놓은 개별 업적들에 대해 좀 더 깊고 구체적인 이해를 함으로써 세종은 무엇을 위해 정치를 하였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에서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비롯하여 측우기, 농사직설 간행 등을 통한 농업장려 간단히 소개하고 이들 개별 사례에 대해 좀 더 깊은 분석을 통해 세종의 정치적 이념을 분석 해보려 한다.
II. 본론-1. 훈민정음
세종은 이미 알려진 바데로 슬기롭고 현명한 임금이어서, 나라 안팎을 지키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면서 교육에 각별한 정성을 기울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세종 임금은 즉위한 뒤 책을 인쇄 하는데 기초가 되는 활자의 글씨체 개량을 직접 지휘할 만큼 글에 대한 관심과 재능이 많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성과 뛰어난 자질은 세종 25년 음력 12월에 몸소 훈민정음 곧 한글을 만들어냄으로써 유감없이 빛을 내었다. 집현전은 고려 이래 조선 초기에 걸쳐 궁중에 설치한 학문 연구기관으로서 세종대왕이 즉위한 후 집현전의 실제 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점차 강화해나감에 따라 처음에 그 인원은 10명이었으나 점차 증원되어 세종 18년에 이르러 20명으로 확정되었다. 세종은 학사들의 연구에 편의를 주기 위하여 많은 전적(유교경전 법전 등의 책을 뜻 함)을 구입하거나 인쇄하여 집현전에 보관시키는 한편, 재주 있는 소장 학자에게는 사가독서(조선시대에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의 특전을 베풀었다. 이로써 수많은 뛰어난 학자들이 집현전을 통하여 배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이룩된 업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훈민정음 창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과정은 그리 순탄하지 만은 않았다. 당시 집현전의 신하인 최만리가 대표가 되어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등이 함께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리며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였다고 한다.
첫째, 대대로 중국의 문물을 본받고 섬기며 사는 처지에 한자와는 이질적인 소리 글자를 만드는 것은 중국에 대해서 부끄러운 일이다.
둘째, 한자와 다른 글자를 가진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티베트) 등은 하나 같이 오랑캐들뿐이니,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것은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일이다.
셋째, 새 글자는 이두보다도 더 비속하고 그저 쉽기만 한 것이라 어려운 한자로 된 중국의 높은 학문과 멀어 지게 만들어 우리네 문화수준을 떨어지게 할 것이다.
넷째, 송사에 억울한 경우가 생기는 것은 한자를 잘 알고 쓰는 중국사회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며, 한자나 이두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관리의 자질에 따른 것이니 새 글자를 만들 이유가 되지 못한다.
다섯째, 새 글자를 만드는 것은 풍속을 크게 바꾸는 일인 만큼, 온 국민과 선조와 중국에 묻고 훗날 고침이 없도록 심사숙고를 거듭해야 마땅한데, 그런 신중함이 전혀 없이 적은 수의 사람들만으로 졸속하게 추진하고 있고, 상감은 몸을 헤쳐 가며 지나친 정성을 쏟고 있다.
여섯째, 학문과 수도에 정진해야 할 동궁(문종)이 인격 성장과 무관한 글자 만들기에 정력을 소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세종 임금은 이에 대해서 세세히 답변을 하지 않고 몇몇에 대해서만 간단히 훈민정음 창제의 목적과 필요성을 밝혔다고 하는데 훈민정음 창제의 목표는 설총이 백성의 글자 생활을 돕기 위해 이두를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탐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만드는 중대한 나랏일임을 밝혔다고 한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훈민정음은 당시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백성을 위한 것이었음을 세종대왕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세종대왕은 신중하게 훈민정음을 몇 번이고 다시 다듬고 신하들과 함께 몇 가지 문헌을 한글로 만드는 실용의 시험을 거쳐 3년이 지나서야 [훈민정음(1446)]을 통해 그 결과물을 반포했다. 이 책의 서두에 실린 짧은 글로써 세종대왕은 중국 것에 사로잡히지 않은 곧은 줏대와 백성들의 어려움을 벗겨 주고자 하는 어진 마음과 단지 삶의 편의를 위해 새로운 글자를 만든다는 실용주의 정신을 진솔하게 표현했다.
"우리 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달라서,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에 어진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 뜻을 담아서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들어 내놓으니,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깨우쳐 날로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결과적으로 이 짧고 간결한 글을 통해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의 그 목적이 조선의 백성을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김정수(1994), 한글의 역사와 미래, 열화당
한글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