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과 훈민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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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종대왕과 훈민정음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국인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봤을 때 가장 자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시기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때가 있다. 조선시대의 27명의 왕 중 유일하게 ‘대왕’이라는 칭호가 붙는 세종대왕의 통치시대가 바로 그것이다. 외국인 학자인 도널드 베이커도 그의 저서 『세종대왕 천지를 자유롭게 하다』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모든 위대한 문명에는 그 문화적 영웅 중에 문화적 창의성을 육성했거나 지적 생활을 부흥시켰거나 기술적, 과학적 진보를 장려한 것 때문에 존경을 받는 정치 지도자가 있었다. 영국에는 엘리자베스1세, 러시아에는 피터 대제, 프랑스에는 루이14세가 있다. 한국에는 세종대왕이 있다.’
이쯤이면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다음으로 유일하게 ‘대왕님’으로 남아있는 지금도 지갑 속에서 웃고 계실 세종대왕의 업적은 따로 열거하지 않아도 또 전부를 알지 못하더라도 실감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만큼의 찬란한 시대에 대한 구체적인 무언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의 전공에서 바라봤을 때 세종의 가장 큰 업적인 훈민정음을 바탕으로 그 시대의 정치에 대한 이해를 조망해 보는 것이 작지만 의미 있는 공부라고 생각한다.
2. 훈민정음 창제
2.1. 집현전의 역할
세종대왕은 태종 18년 왕세자가 됨으로써 같은 해 8월 조선의 제4대 왕에 즉위하였다. 태종 이방원이 죽지 않고 태상왕의 자리에 있었기에 그의 영향을 받았으나 태종 승하 후 그는 태종이 이룩해놓은 왕권의 안정을 바탕으로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유학자들과 왕도정치를 꾀하게 된다.
그는 1420년 중앙집권 체제를 이룩하기 위해 집현전을 설치하여 의정부의 독주를 견제함으로써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구현하였다. 후대 세종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세종대의 여러 업적은 집현전의 효율적 운영에 따른 것이라 하니 훈민정음 창제와도 관련된 집현전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자.
□ 세종 7권 2년 3월 16일(갑신) 001 / 집현전의 인원수를 정하고, 관원을 임명하다.
집현전에 새로 영전사(領殿事) 두 사람을 정1품으로, 대제학 두 사람을 정2품으로, 제학(提學) 두 사람을 종2품으로 두되, 이상은 겸직이요, 부제학(副提學)은 정3품, 직제학은 종3품, 직전(直殿)은 정4품, 응교(應敎)는 종4품, 교리(校理)는 정5품, 부교리는 종5품, 수찬(修撰)은 정6품, 부수찬은 종6품, 박사(博士)는 정7품, 저작(著作)은 정8품, 정자(正字)는 정9품으로, 이상은 녹관(祿官)으로 하며, 모두 경연관(經筵官)을 겸임하였다. 부제학 이하의 낭청(郞廳)은 10명을 두되, 품에 따라서 임명하고, 차례대로 가리어 전임(轉任)하며, 각품에서 두 사람을 초과하지 아니하였다. 5, 6품은 부검토(副檢討)를 겸임하였다. 각품의 차례는 다 본 품반(品班)의 머리로 하였다. 제학과 부학의 서열은 사간(司諫)의 위로 하였다. 박은·이원으로 영전사(領殿事)에, 유관·변계량을 대제학에, 탁신(卓愼)·이수(李隨)를 제학에, 신장(申檣)·김자(金)를 직제학에, 어변갑(魚變甲)·김상직(金尙直)을 응교(應敎)에, 설순(循)·유상지(兪尙智)를 교리(校理)에, 유효통(兪孝通)·안지(安止)를 수찬(修撰)에, 김돈(金墩)·최만리(崔萬理)를 박사(博士)에 임명하였다. 처음에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수문전(修文殿)·집현전·보문각(寶文閣)의 대제학과 제학은 2품 이상으로 임명하고, 직제학·직전(直殿)·직각(直閣)은 3, 4품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러나, 관청도 없고 직무도 없이 오직 문신으로 관직을 주었을 뿐이었는데, 이제에 이르러 모두 폐지하고, 다만 집현전만 남겨 두어 관사(官司)를 궁중에 두고, 문관 가운데서 재주와 행실이 있고, 나이 젊은 사람을 택하여 이에 채워서, 오로지 경전과 역사의 강론을 일삼고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였다.
위의 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세종에 의해 개편된 집현전은 중앙집권 체제를 구현하기 위한 기관임과 동시에 학문 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이행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 건국 이래 표방해온 유교주의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학문 활동과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던 집현전이 훈민정음의 창제라는 주제에 늘 따라다니는 이유는 긍정적인 이유에서가 아닌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논란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라는 데에 있었다.
참고문헌
5. 참고자료
세종의 국가경영(수업교재)
훈민정음과 국어연구(역락출판, 이상혁저 2004)
조선후기 훈민정음 연구의 역사적 변천(역락출판, 이상혁저 2004)
번역하고 풀이한 훈민정음(한국문화사, 조규태저 2000)
조선왕조실록의 홈페이지(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집현전’ - 네이버 백과사전
http://www.kbs.co.kr/1tv/sisa/hdhistory/index.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