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이해 청나라의 정치 문화 사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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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의 이해 청나라의 정치 문화 사법1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청 황조는 이민족 정복황조였지만 원황조와는 달리 中國의 전통문화를 존중하고 한족 지식인들을 우대하였다. 그러나 청 시대에는 中國문화가 파괴되지 않은 채 발전이 진행됨으로써 역으로 만주인들이 中國문화에 동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청 시대 문화의 중심은역대 황제의 보호와 장려 속에서 재정적으로 풍족했던 수도 북경지역과 사회경제의 발달로 인하여 형성된 막대한 상업자본을 배경으로 성장했던 창강 하류 일대의 지역이었다. 청 황조는 정치적인 비판을 엄금하였던 까닭으로 자유로운 기풍이 억압되어 문화면에서 창조성이 결핍되어있다.
2)학술
청왕조의 학문을 대표하는 것은 考證學인데, 이것의 지나친 발달은 이민족 지배를 유지하기 위하여 청왕조가 취한 사상통제의 산물이었고 청대 문화의 특색은 반만 사상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강희제는 反滿사상을 억압하고 민심 수습을 위하여 명 왕조에 이어 주자학을 전통적인 官學으로 삼았으며, 스스로도 여러 학문을 익히고 한문화에 친숙해졌다. 中國에 관한 자신의 지식을 늘이기 위해 황제는 무수한 저작, 특히 백과사전 성격의 저작을 편찬하도록 했다. 또한 대규모로 도서를 편찬하도록 하여 지식인들의 관심을 돌렸고, 또 잦은 文子獄으로 인해 새로운 학문적 이론을 펴기보다는 실증적인 고증학이 일어 나게되었다. 명 말기 이래 고염무, 황종희 등은 명대의 양명학에 대한 반동으로 經世實用을 주장하며 고증학의 문을 열었다. 청대의 학술 연구는 앞 시대에 비하여 크게 바뀌어 경사의 考證, 訓에 중점을 둠으로써 漢學 또는 樸學이라고 부르고 있다. 청왕조는 얼마 안 있어 그 지배가 확립됨과 동시에 반민학자들에 대하여 엄격한 태도로 임하였으니 그로 인하여 반민사상은 지하로 숨어들었다. 청대 고증학의 대표적 저작은 문자학에 段玉栽의 《설문해자주》, 왕념손의《광아소정》, 강영의《고운표준》, 대진의 《성운고》등과 대표적인 학자로는 훈고학에 왕인지, 금속학에 필원, 목록학에 주이존, 판본학에 황비열, 교감학에 하작등이 있다.
3)역사
청대의 역사 연구는 고증과 훈석에 중점을 두었고, 또 사료의 편찬도 성행하여 여러 차례 전문 기관을 두고 사서를 편찬하였으며, 개인의 저서도 풍부하였다.
청대에는 60년에 한 번씩 각 지방마다 지방지를 편찬하도록 규정을 만들어 각 지방의 자료를 풍부하게 보관했다. 현존 方志 약 6천여 종 가운데 약 4,300여 종이 청대인이 남긴 것이다. 특히 지방지 편찬에 앞장섰던 장학성은, 《호북통지》, 《화주지》 등 10종에 달하는 지방지를 편찬하였는데 紀, 表, 考, 圖, 略, 傳등을 포함 시켜 광범위한 자료를 남겼다. 한편 청대에는 사서 저술의 충조가 성행하였으나 장정룡의 ‘명사안과’ 대명세의 ‘남산집안’ 등으로 문자옥이 일어났기 때문에, 당대사의 역사를 저술하는 풍조는 쇠퇴하였다. 전조망 같은 경우도 문집 가운데 명 말기 명현들의 유사를 남겼지만 출판하지는 못했다. 때문에 주로 과거 사적에 대한 고증과 사평이 중심이 되었는데, 전대흔의 《이십이사고이》, 조익의 《이십이사차기》가 대표적이다.
4) 문학
청대의 문학은 현실주의적인 면이 비교적 강하나, 청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면서 복고주의와 형식주의가 時, 詞, 散文 가운데 나타났다. 이 가운데 청 초기의 시인 점겸익, 오위업이 대표적이었는데 전자는 만당과 송대에 가깝고 기교와 창조성이 있었으며, 후자는 화려하고 처량하면서도 典故를 응용하여 뜻을 숨겼기 때문에 詩史란 말도 있다.
청대의 문학은 원, 명에 이어 희곡, 소설의 발달이 뚜렷한데, 희곡에서는 《장생전》 《도화선》이 2대 명작으로 손꼽히고, 소설에서는 《요재지이》 《부생육기》 외에 《유림외사》 《홍루몽》의 2대 장편이 당시의 사대부나 관료 귀족의 생태를 폭로하여 쌍벽을 이루었다. 또한 《홍루몽》은 명말 이탁오.공안파 시인 이해의 성정해방론과 유.불.도 3교 절충사상을 지니고 있다. 또 청나라 말기에는 린수등를 통하여 유럽의 근대 소설이 소개되어, 게몽사조의 일환을 짊어짐과 동시에 《관장현형기》 《노잔유기》 《20년목도지괴현상》 등 관계의 부패를 폭로한 정치소설이 나타나 소설의 역할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5)미술
청왕조 미술의 특징이 가장 명료하게 나타난 것은 회화이다. 그것은 명왕조 회화의 연장이지만, 명대 뿐만 아니라 中國4000년 회화사의 終章을 장식하기에 알맞은 것으로써, 오랜 전통을 보우한 정통파가 이민족의 정복하에서도 그대로 畵系를 바꾸어나가, 양상을 변화시키며 최후의 빛을 발하면서 지평선 너머로 꺼져가는 듯한 느낌이다. 그 최후의 빛을 발한 화가로 석도와 주탑이 있다. 이들은 명왕조의 왕실 출신으로 명왕조 멸망 수 출가하여 禪僧이 되었으나 마음속에 불타는 치열한 저항정신으로 화필을 구사, 기성 화가와는 전혀 다른 자유롭고 독특한 中國문인화의 예술을 쌓아 올렸다. 또한 이들과 같은 시대인 淸初 왕시민, 왕감, 왕휘, 왕원기, 오력, 운수평등 소위 4왕오운 등은 한 파를 형성하고 당시 화단을 이끌었다. 서양화는 명 말기에 그 화법이 中國에 들어와 일부 화가는 서양 화법을 받아들여 그림을 그렸다. 내정화원에서는 서양화에 능한 선교사를 초청하여 中國화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는데 당시 화원에서 활동한 선교사는 카스틸리오네, 지겔파스테가 있는데, 특히 전자는 《백준도》를 그려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