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인간경영 경영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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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종대왕의 인간경영 경영학과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 나라의 지폐에는 그 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인의 모습을 새겨놓는다. 우리나라 만원 지폐에는 바로 세종대왕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한글 창제,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역사에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뿐만이 아니다. 측우기 등 과학문물 발명, 국가 영토의 확장, 농업에서의 비료 사용으로 인한 생산증대와 조세 제도의 개혁, 법과 음악, 역사의 재정립 등 그의 시대에는 역사에 남을 업적들이 많았다. 그렇다면 조선의 오랜 역사 중 많은 업적이 왜 세종대에만 집중되어서 일어났던 것일까?
또 황희, 맹사성, 허조, 박연, 장영실, 김종서 등 세종대에는 어렸을 적 위인전에서 보았을 법한 인물들이 많다. 분야도 정승, 음악가, 발명가, 장군 등으로 다양하다. 그렇다면 세종대에만 유독 이런 다양한 위인들이 많았던 이유는 또 무엇일까? 물론 세종대에만 뛰어난 인물이 태어났던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 다른 임금들의 시대에도 이런 뛰어난 인물들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세종은 인재의 중요성을 알고 훌륭한 인재를 발굴하여 잘 활용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임금들의 시대에는 이러한 인물들이 초야에 묻히거나 모함에 연루되어 자신의 능력을 활용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세종이 대왕으로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인재를 잘 활용할 줄 알았다는 점, 즉 인재경영이라고 생각한다. 세종은 인재를 알아보는 뛰어난 안목을 가지고 있었고, 그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할 줄 알았다. 인재가 자신의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도록 하였고, 이에 대한 성과에는 확실하게 보상을 해주었다. 또 훌륭한 인재가 주위에 많았던 것뿐만 아니라 세종 그 자신도 이러한 인물들을 뛰어넘는 대단한 천재였기 때문에 인재를 활용할 줄 알았다. 경영자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아야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들을 나타나게 한 경정적인 요소는 바로 세종의 위민정신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글창제, 측우기 발명, 농법 개량, 조세 제도 개혁 등 모든 일들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세종은 인재를 알아보고 사용할 줄 알았고, 그 자신이 뛰어난 인재였으며,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들의 원동력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었다고 생각한다. 본론에서는 세종의 뛰어난 인재경영 능력을 앞서 언급한 네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본 론
1.인재를 알아보는 뛰어난 안목을 갖추었다.
세종 시대 과학기술은 조선 시대 500여년을 통해 가장 유례없는 발전을 이룩했다. 그 이유는 바로 세종의 능력주의에 근거한 철저한 열린 인사정책과 개방정책 덕분이었다. 신분을 뛰어넘어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인재들은 역사상 종종 있어왔다. 그러나 세종 시대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게 인재들이 등장한 예는 일찍이 찾아볼 수가 없다. 인재들은 마치 세종이 나타날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솟아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과학 분야의 뛰어난 영재인 장영실이었고, 음악 분야의 천재 박연이었다. 또 ‘농사직설’을 편찬함으로써 조선 농업의 생산성 증대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정초와 6진을 개척한 김종서, 그리고 대마도를 정벌한 이종무 등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장영실은 세종 시대 능력주의에 근거한 발탁 인사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원래 부산 동래현의 관노였다. 아버지는 중국에서 귀화한 원나라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기녀였다. 이 같은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장영실을 특채로 뽑아 들였다. 세종은 장영실이 과학 분야의 전문가라는 보고를 받고, 그를 당시 조선의 대표적인 천문학자와 함께 대궐로 불러들여 천문 관측에 대해 토론을 벌이며 그의 능력을 검증해봤던 것이다. 세종은 장영실의 비상한 능력을 곧바로 알아보고, 또 한사람의 인재를 얻었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하여 세종은 장영실을 발탁 인사 조치하며, “그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가 있을 뿐만 아니라, 성품이 영특하고 매양 강무에서도 열심히 노력하여 뽑는다.”고 하였다.
이는 실로 파격적인 인사 조치였다. 세종은 장영실을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종6품인 상의원 별좌에 임명하게 된다. 이 직책은 왕실천문, 지리, 역법 연구 기관인 서운관의 천문학 교수 및 고을의 현감과 같은 지위였다. 이러한 파격적인 인재 스카우트 정책과 함께 세종은 그를 곧바로 중국에 유학시켜, 최첨단의 이슬람 과학 기술을 도입할 것을 지시한다.
세종의 전폭적인 관심과 지원에 힘입어 장영실은 15세기 당시 세계 최첨단의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초정밀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를 발명하고 측우기, 해시계, 간의대 및 기계, 건축, 과학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그는 과학 분야에서 제작 및 감독 역할을 맡아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낸다.
세종 61권, 15년( 1433 계축 / 명 선덕(宣德) 8년) 9월 16일 을미 3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