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철학 및 교육사 - 제 3절 백제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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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교육철학 및 교육사
제 3절 백제의 교육
백제는 고구려와 마찬가지 일찍부터 중국과의 교섭이 잦았으므로 직접 유교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으나, 그에 따른 학교제도가 있었다는 역사적 기록은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가 태학을 설립하기 87년 전인 서기 285년에 박사 왕인이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일이라든지, 서기 375년에 박사 고흥을 시켜 [국사]를 편찬한 사실, 또 모시박사, 의박사, 역박사, 오경박사의 제도가 있어 항상 일본에 초빙되어 갔다는 사실 등으로 볼 때 백제에도 고구려의 태학과 같은 교육기관이 있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박사란 중국측 사료와 고구려의 직관에 나타난 것을 보아 교학지임을 맡은 일종의 관직임과 동시에, 한학 또는 유학의 경전에 정통한 학자들을 칭하는 별호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백제가 일본에 한문과 유교경전을 전파할 수 있었던 문화적 수준과 각종 정연한 박사제가 있었다는 것으로 볼 때 백제의 유학수준이 매우 높았으므로, 백제에도 최소한 고구려 수준의 유학 교육 기관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제 4절 신라의 교육
서기전 57년부터 935년까지 56대 992년간 존속하였던 신라의 교육은 7세기경 삼국통일 이전의 화랑도 교육과 이후의 학교교육으로 구분하여 서술함이 일반적 경향이다. 왜냐하면 신라는 삼국통일 이전까지는 화랑도로 교육의 전반을 대치하다가 통일신라 이후부터 중국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학교의 설립 정비와 더불어 국학을 세우고 유교경전을 가르쳤기 떄문이다.
1. 화랑도 교육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지정학적 위치 면에서 가장 불리하였기 때문에 사회제도나 문화 면에서 발전이 제일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건은 신라로 하여금 독자적인 자주문화를 유지하게 하고, 그 후의 외래문화를 선별하여 수용함으로써 주체적인 사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것은 화랑도 교육사상을 발달시킨 배경이었다.
신라는 분명 형식을 갖춘 고구려와 백제의 태학이나 경당 같은 학교교육기관의 설립은 늦었다.
그러나 교육의 본래 사명이 인재의 양성과 민중교화에 있다고 본다면 신라 고유의 화랑정신에 의한 교육은 동서양의 교육사에 나타난 교육사상에 비추어 보아도 훌륭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신채호는 화랑도에 대하여,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 온 자는 화랑이다.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사를 말하려는 것은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찾음과 한가지인 우책이다”라고 하였다.
화랑의 기원은 삼한시대 소도를 지키던 선량한 무사에서 온 것으로, 그 때의 선이라 칭하던 자이다. 이것이 고구려에서는 조의선인, 신라에서는 화랑이라 하였다. 또 화랑을 ‘부루’(풍류)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부루’는 상고시대부터 숭배신앙의 대상인 태양, 즉 곧 ‘밝은 뉘’(광명의 세계)가 변한 말이요, 이 ‘부루’가 한자로 적힐 적에 풍류라고 기록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화랑은 상고시대 힘세고 순결한 젊은 소도지기로서의 ‘선인’과 고구려시대 학문과 덕망 그리고 인격을 갖춘 태학의 ‘조의선인’처럼 우리 선조들이 바라던 이상적 인간상 중의 하나이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선비’나 ‘군자’의 상으로 이어졌고, 현대사회에서 기대하는 교육적 인간상으로 표현되는 전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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