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chelangelo Buonarroti 르네상스인 미켈란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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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Michelangelo Buonarroti
르네상스인 미켈란젤로
여름 방학에 유럽 여행을 가서 바티칸에 다녀왔다. 매우 큰 규모를 자랑하는 바티칸 박물관의 하이라이트는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치창조와 최후의 심판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피에타 상도 아름답지만 규모부터 보는 사람을 압도하게 하는 최후의 심판과 천지창조는 책으로 보았을 때보다 실제로 보았을 때 훨씬 더 전율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림의 아름다움과 그림에 담긴 숭고한 의미,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랜 시간동안 여러 가지 불화와 음해 속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서 벽화를 완성시킨 미켈란젤로라는 화가의 예술혼에서 큰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로 레오나드로 다빈치, 라파엘로와 함께 르네상스 시대의 3대 거장으로 천재라 불리우며 많은 작품을 남긴 그의 업적 이면에 인간과 예술을 삶의 제왕으로 삼아 파격과 모순, 불균형의 균형으로 예술의 한 정점을 살아간 그의 삶의 결정체를 볼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이었다.
바티칸 시국에 다녀온 이후로 미켈란젤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예술과 사상 시간에 르네상스에 대해 배웠는데, 나는 미켈란젤로를 통해 르네상스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자 한다. 제목에 붙인 ‘르네상스인 미켈란젤로’는 미켈란젤로에 대해 다룬 책과 동명의 이름으로 방영된 BBC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의 이름을 참고하여 붙였다.
미켈란젤로는 성이 아니고 이름이라고 한다. 역사적인 인물들이 성으로 통용되는 게 보통인데 비해 그는 예외적으로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이들이 많았을 텐데 미켈란젤로라는 이름으로 불린 자는 단 한사람 바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뿐이었으니 역사가 그의 위대함에 내린 최대의 찬사이자 경의의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예술가 미켈란젤로의 생애
그는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발상지였고 예술의 중심지 였다. 그러나 그는 예술의 중심지에서 조금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예술을 이해 하지 못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의 집안은 귀족의 혈통이라고는 하나 부와 권력을 풍요롭게 누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미켈란젤로에게 문법공부를 시키려 했으나 그는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는 귀족 출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한다고 자주 꾸지람을 했다.
그러다 결국 13세에 견습생이 되었고 건축과 회화, 그리고 조각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1년만에 그곳을 나왔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는 일화가 있는데 당시 대가들의 공방에는 제자들의 교육용 혹은 시범용으로 쓰이던 스케치 샘플들이 있었다. 그림을 배우던 미켈란젤로가 하루는 장난기가 발동하여 스케치 중의 한 점을 빼낸 후 자신이 그린 스케치로 바꿔치기를 했다. 그러나 이를 스승이 알아채지 못하자 그는 이같은 선생 밑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공방을 나왔다고 한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의 눈에 띈 때였을 것이다. 로렌초는 재능있는 소년 미켈란젤로를 알아보고 자신의 집에서 아들처럼 돌보았다. 미켈란젤로는 거기서 메디치가를 드나들던 당대 최고의 철학자들과 한 식탁에서 식사하면서 대화하고 토론하는 생활을 했다. 미켈란젤로는 신플라톤주의와 같은 당시에 유행하던 철학을 접하면서 그의 지적 수준을 높일 수 있었다. 이때가 1590년쯤이니 그의 나이 겨우 15세 때의 일이다.
1492년에 이탈리아 전체의 예술 전반을 후원하던 메디치가의 로렌초 데 메디치가 사망하고 그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가 통치를 하기 시작하였다. 사바나롤라가 등장하여 쇄신과 근본 주장하기 시작하였고 당시 피렌체는 쾌락, 혼돈에 쌓인 상태였다. 미켈란젤로는 사바나에 공감하면서도 자신의 작품이 누드가 많은 것에 갈등을 가졌었다.
당시 미켈란젤로는 무명에 가난했고 피렌체를 떠나 일거리를 찾아다니다 다시 돌아와서 돈벌이를 위해 ‘잠자는 큐피트’ 를 오래된 골동품처럼 조작하였다. 그 그림을 리아리오 추기경이 사 들였는데 그림이 거짓임을 알았지만 예술적 재능을 알아보고 바커스 그림을 그려달라고 의뢰한다. 미켈란젤로는 넘어질듯 술에 취한 상을 조각해 주었다.
그때부터 미켈란젤로는 작업을 시작해 조각·회화·건축·시·문학 분야에서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죽기 며칠 전까지 ‘피에타’를 대리석에 조각했었다고 하니 평생 쉼없이 작업한 셈이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다비드 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