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식의 무교 이해 논찬

 1  유동식의 무교 이해 논찬-1
 2  유동식의 무교 이해 논찬-2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유동식의 무교 이해 논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2
“유동식의 무교이해”에 대한 논찬
우리는 이하 논찬문에 등장하는 ‘우리는’이라는 용어는 논찬조인 이용민, 송정연, 윤상림을 말한다.
본 발제문에 대한 논찬을 위해 여러 번 그 내용의 논지와 구조를 살피는 과정에서 일단은 이것이 한국종교사 수업에 있어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우리에게 유동식과 유동식의 신학과 그의 무교연구에 대한 이해가 일천함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만 여기에서는 논찬의 소임인 토론의 장을 펼치는 단추 역할을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질문하고자 한다.
첫째, 유동식은 ‘과연 아시아에 공통된 어떤 근원적인 정신구조라는 것이 없는 것일까?’하는 자문에 대해 ‘샤마니즘이야말로 아시아의 제민족 사이에 공통된 종교현상’이며 ‘북방의 원형적인 무의형태를 볼 수 있는 곳으로 한국이 세계에서 유일한 장소’라 하여 자신의 한국무교에 관한 연구 의의를 대단한 포부로 밝히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한국무교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구조’를 찾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유동식이 채용한 엘리아데의 종교현상학적 방법은 한국무교의 입장에 서서 그 의미를 해석하고 그것의 역사적 과정을 객관적으로 천착하는 것이다. 유동식의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를 중심으로 하여 논의를 집중한다고 했을 때, ‘단순히 무교라는 한국종교를 종교학적인 안목으로 객관적 시각에서 바라본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의 눈으로 무교를 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동식 개인의 신학적 가설을 입증하고자 하는 노력이 명백히 드러내는 것’이라는 말은 유동식의 입장과 발제조의 입장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연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에는 감리교 신학자 유동식이 한국무교를 이해하는 그 신학적 틀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나 작용하고 있는 것인가?
둘째, 우리는 본 발제의 서론을 통해 무교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의 유동식의 사상적 변천과정을 더듬을 수 있다. 즉 『한국종교와 기독교』(1965)에서는 무교에 대해 극히 부정적이었으나,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1975)에서는 무교와 풍류도에 대해 적극적인 평가를 정립하였고, “한국의 문화와 신학사상-풍류신학의 의미”(1984) 이후에는 그 유명한 풍류신학을 창출하였다는 것이다. 대충 10년을 단위로 시기가 구분되고 있다. 이 각각의 시기는 40대, 50대, 60대의 유동식을 대변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1960년대 즉 40대의 유동식이 하필이면 ‘토착화 신학논쟁’을 촉발시킨 직후, “무교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면만을 부각시켰다”는 의미를 정확히 집고 넘어가야 유동식의 신학적 사상의 변천과정을 ‘연속’ 내지는 ‘불연속’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그의 풍류신학의 정체도 약간은 명확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 토론하였다. 우리의 토론에 대한 발제조의 견해를 듣고 싶다. 왜냐하면 발제조는 ‘유동식의 무교 이해를 그의 풍류신학의 관점에서 넓혀 보는 것은 그 논점을 흐리게 할 것’으로 여겨, 풍류신학을 한국무교 연구에서 발전한 것으로 간단히 다루고 있고, 이 두 연구에 대한 평가를 구분하지 않는 경향이 엿보이는 듯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연구에 대해서 구분을 해주어야 혼동되는 점을 막고, 활발한 토론의 장을 열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셋째, 우리는 발제조가 결론의 마지막에 있는 “무교문화론” 부분에 이르러 다소 생소함을 느꼈다는 점에 대해 다소 의아함을 느낀다. 마치 무교문화론과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를 별개로 구분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생소함’을 일깨워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유동식은 무교는 살아있다고 외치면서 ‘무교의 에너지가 여전히 민중과 한국문화 속에 간직되어 보이지 않게 작용하는 것은 그것의 강한 열량 때문인데, 이 열량이 억압되는 대신 창조적인 열량으로 변화되기만 한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다’고 서론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것을 무교문화론의 핵심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넷째, 유동식의 무교이해를 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그의 한국종교이해에 대해 좀 더 다루었다면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유동식은 무교를 지핵으로 하여, 유불선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따라서 유불선에 대한 그의 독특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유동식은 조선시대가 무교를 억압했으나, 무당이 되는 데에는 남녀귀천을 가리는 것이 없었다고 지적한다. 특이하게 연산군을 무병을 앓은 인물로 다루고 있다(206-7). 또한 불교에 있어서도 원효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엿볼 수 있다. 원효가 창조력을 발휘하게 된 것을 그 저변에 무교적 전통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도교에 있어서, 화랑도에 영향을 준 것을 고래의 신선사상이라고 하여 구분하고 있는 점을 찾아볼 수 있다. 무교와 한국종교의 관계를 보다 입체적으로 설정하여 서로 대비되거나 중첩되는 내용을 분석하면 유동식의 한국무교에 대한 입장을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유동식이 밝힌 한국무교의 근본적 원형이 한국의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무엇과 관련하여 변하고 변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살필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유동식이 역사학자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접근을 하려고 한 점에 대해서 높이 평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미리 특정한 구조를 설정해놓고, 그 구조에 따라서 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무교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는, 역사학적 접근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기독교 신학의 눈으로 무교를 보려는 목적’이 과연 역사적 접근에 가까운 것인지, 아니면 조직신학적 접근에 가까운 것인지는 함께 토론해 보아야 할 문제라 여겨진다. 우리로서는 역사적 접근과 조직신학적 접근의 차이와 그러한 접근의 결과로 야기되는 역사적 근거의 진위가 반드시 상충되는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에 공감할 뿐이었다. 이는 한국종교사 수업 전체에 걸쳐있는 문제로서,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다뤄졌던 한국종교의 내용을 고찰하는 과정의 난점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라스트, 용어의 혼동을 막기 위해서, 유동식은 샤머니즘, 한국무교, 그리고 무격신앙을 구분하고 있다. 즉, 샤머니즘은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일대의 보편적인 한 원시종교 현상을 가리킨다. ‘샤만’이란 무당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에 샤마니즘이란 결국 무당종교 또는 무교라는 뜻이다. 한국무교란 명칭은 한국적 샤마니즘에 대한 고유명칭을 말한다. 무격신앙은 현재 우리가 접촉할 수 있는 한국무교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무교, 무교문화론, 풍류도, 풍류신학 등의 개념을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유동식의 사상에서 엿보이는 루돌프 오토, 폴 틸리히, 루돌프 불트만, 멀치아 엘리아데 등등의 사상적 단초를 세밀하게 구분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끝으로 유동식 선생님의 직계 제자들이라 할 수 있는 ‘우리들 중 그 누가 음주가무에 능한가?’라는 물음에 손가락 가리키며 ‘바로 당신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하나 떠올릴 수 없다는 서글퍼 해서는 안 되는 서글픔을 절감하며 논찬을 마친다.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