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옥의 이탈과 실험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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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옥의 이탈과 실험보고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이옥(1760-1815)은 정조(재위: 1777~1800) 14년(1790)증광시 생원급제 이후 성균관 유생으로서 科文에 小品體를 구사하였다. 이 일로 그는 국왕 正祖에게 ‘文體反正’과 관련된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었고, 급기야 군에 편적되어 유배까지 갔다.
실록에 따르면 1792년에 이옥은 성균관 유생으로 지내면서 應製旬語에 소설문체를 썼고, 이를 선비들이 답습하는 정도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이에, 정조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매일 四六文 50수를 채우게 하고 낡은 문체를 완전히 고친 뒤에야 과거에 나아가도록 명하였다. 이옥은 이때부터 문체로 인하여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追記南征始末〉에 의하면 이옥은 36세(1795년, 정조 19년)때에도 성균관 유생으로 迎欒製(영난제)에 응하였는데, 정조는 이옥의 문체가 괴이하다 하여 停擧를 명하였다가 곧 개명하여 充軍케 하였다고 한다.
2. 이옥의 작가적 자세
이옥은 스스로 주장하기를 “나는 요즘 세상의 사람이다. 내 스스로 나의 시, 나의 문장을 짓는데 先秦兩漢에 무슨 관계가 있으며 魏晉三唐에 무어 얽매일 필요가 있는가”(김려, )하였는데, 이 말은 참된 가치는 전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입장에만 있다는 말이다.
심지어 중세적 사유의 핵심이라 할 朱子의 글에 대해서도, 그 글의 道德, 天理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을 생략한 채 일상적인 유용함이 있다고만 주장한다.
“주자의 글은 理學家가 읽으면 담론을 잘 할 수 있고, 벼슬아치가 읽으면 疎箚(소차:상소문)에 능숙할 수 있고, 과거시험 보는 자가 읽으면 對策에 뛰어날 수 있고, 시골 마을 사람이 읽으면 편지를 잘 쓸 수 있고 胥吏가 읽으면 帳簿정리에 익숙할 수 있다. 천하의 글은 이것으로 족하다”()
도덕과 천리를 논해야 하는 주자의 글을 두고 말을 잘하고, 소차를 잘 짓고, 대책에
뛰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폄하다. 시골 사람은 편지를 잘 쓸 수 있고, 서리가 장부정리에 익숙해질 수 있다는 언급에까지 이르면 주자 문장의 일상적 유용함에 대한 옹호는 트릭이 되며 일종의 모독에 가깝다.
이옥은 전범적 문장 일체를 부정하고서 자신이 처한 시대에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솔한 언어창출을 추구하였다.
3. 이옥 문체의 위상과 탈중심적 글쓰기
1) 문체반정의 전개와 이옥 문체의 위상
당시 국왕 정조는 문체의 문제로 남공철,이상황,김조순,심상규 등을 지목하여 반성을 얻어내고 그 와중에 박지원의 가 문풍변질의 원흉으로 지적되어 물의를 일으켰던 사건이 바로 정조의 문체반정인데, 그 과정에서 실질적인 처벌을 받은 사람은 유일하게 이옥뿐이었다. 문체를 통한 첨예한 정치적 알력의 와중에 한미한 선비였던 이옥이 희생양으로 선택된 감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이 사건은 이옥이 문체에 대하여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던가를 말해주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이옥은 더욱 철저하게 독자적인 창작태도로 일관하여 이조후기 우리 문학사에서 소품체 작가의 한 축을 형성하였다.
문체반정을 통해 정조가 요구한 醇正古文은 唐宋八大家의 문장을 전범으로 삼아, 유가적 이상을 표현하는 격조있는 문체였다. 정조가 고문을 강조하게 된 데에는, 기실 남인들이 대거 연루된 천주교 사건이 불거질 때 공격의 예봉을 천주교에서 문체론으로 옮겨 남인들을 보호하려는 의도가 없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낸 논리는 邪學(천주교)이 뿌리내릴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는 역할을 소품문이 하고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대상을 거시적인 성리학적인 道의 시각과 고문의 격조있는 문체로 표현할 때는 보이지 않던 문제가, 미시적인 관점에서 소품문체로 표현하며 바라볼 때 새로운 각도에서 보인다. 바로 새로운 각도의 시선은 이전의 전범화된 사상과 문체를 부정하게 되어, 결국 성리학적질서와 고문적 문체의 부정을 낳게 되었다. 이에 정조는 신기한 것을 다투어 모방하다가 성일을 그릇되이 여기고 윤리를 무시하게 되는 것이라고 소품문을 단정지었다. 이런 점에서 소품적 문체는 중세적 질서의 입장에서 본다면 대단히 위험하고 폭발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고문을 지킨다는 것은 중세적 질서의 근간인 성리학적 사유를 지킨다는 의미가 있다. 고문이 무너지면 성리학적 질서가 무너지고, 중세적 질서가 무너지고, 왕권이 흔들리게 된다. 이 시기 문체의 문제는 바로 세계관의 문제요, 중세질서 유지 욕망과 그에 대한 이탈욕망이 충돌하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에서 정조의 문체반정과 이옥의 집요한 문체이탈현상이 발생한 것이다.